비디오 아트
“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이 남긴 말이다.
그는 불현듯 과학 기술과 예술적 영감을 결합해 새로운 세계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탄생한 그의 작품에 열광했다.
그가 비디오 아트를 새로운 예술 도구로 선택한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재미’에 있었다.
조선 최고의 부잣집 아들이었던 백남준은 1956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군사정권은 일제에 협조한 일가의 재산을 몰수했다. 머지않아 파산에 이른 그는 금전적 상실을 계기로 ‘어차피 가난해졌으니 예술만큼은 비싼 돈을 들여 보자’라는 마음을 먹는다. 1963년, 백남준은 돌연 가진 돈을 전부 털어 고물 TV 13대를 사들이고,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작품을 제작해 전시한다. 이 작품은 처음에는 큰 호응을 받지 못했으나, 훗날 비디오 아트의 지평을 최초로 연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어 1974년, 백남준은 브라운관 TV 앞에 부처 조각상이 앉아 있는 ‘TV 부처’ 작품을 공개했다. 화면에는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부처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출력되고, 부처는 텔레비전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형태다.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서양 과학 기술과 동양의 영적인 세계를 절묘하게 조합한 작품’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당대 비디오 아트의 중심에는 브라운관 TV가 있었다. 브라운관은 CRT(Cathode Ray Tube)로 불리는 디스플레이 장치다. CRT는 크게 전자빔을 쏘는 전자총, 전자빔 방향을 조절하는 편향부, 형광물질이 칠해진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음극은 전자를 방출하는 역할을 하며, 전자는 음극으로부터 가속되어 전자총을 향해 이동하게 된다. 전자총에서 충돌한 전자는 형광물질이 도포된 화면과 충돌하며 빛을 발생시키고, 이로써 이미지가 생성된다.
브라운관 TV는 예술의 통념을 깰 수 있는 새로운 도구였다. 캔버스에 붓칠하지 않아도, 직접 돌이나 나무를 조각하지 않아도 작가의 세계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과학 기술과 예술의 조화는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임과 동시에, 나날이 도약하고 있는 인류에게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 매체는 어떤 존재인가’와 같은 의미 있는 논제를 던져주었다.
작가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텔레스크린을 통해 24시간 개인의 일상이 감시받는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하지만 실제 1984년이 되었을 때, 백남준은 세계 최초 인공위성 생중계방송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한 영상을 송출한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영상에는 전 세계 예술가 100여 명이 등장해 각기 다른 재주를 펼친다.
그가 영상으로 나타내는 메시지는 이러하다. “안녕하세요, 오웰. 당신은 1984년을 암울하게 묘사했지만 우리는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세계엔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하고 우린 텔레비전을 통해 그것을 공유해요. 아무래도 당신이 조금 틀린 거 같아요.” 조지 오웰이 걱정했던 미디어 감시를 백남준은 전 세계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창구로 승화시킨 것이다. 현재 굿모닝 미스터 오웰 40주년 특별전 <일어나 2024년이야!>가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입체적으로 연구해 2024년의 응답을 담았다고 한다. 내년 2월까지 개최되니 전시장에서 직접 작품을 즐겨보는 것을 추천한다.
백남준의 또 다른 대표작은 <다다익선>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기념하여 제작된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제작에 총 1,003대의 브라운관 TV가 동원되었으며, 이는 개천절을 의미한다. 브라운관 TV에는 한국의 고려청자, 프랑스의 개선문,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등 각국의 문화적 상징물이 출력된다. 이로써 동서양, 과거와 현재, 세계 인류가 예술과 과학 기술을 통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2018년 누전에 따른 화재 위험이 제기된 뒤 가동이 전면 중단됐으나, 4년간의 보수 및 복원을 거쳐 2022년 재가동됐다.
예술의 묘미 중 하나는 틀을 깨고 변혁을 이뤄내는 자들의 행보에 있다. 백남준 생전 자신을 ‘대중매체를 예술형식으로 선택한 예술 깡패’라고 지칭했다. 그만큼 파격적인 행보를 통해 예술의 새로운 면모를 선보이겠다는 일종의 출사표였을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오브제가 예술과 엮여 대중의 마음을 훔칠 것인가. 예술이란 잔잔한 호수에 파동을 일으킬 또 하나의 울림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