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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우리나라 장묘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대전 동구 이사동 한옥마을숲

은진송씨 가문의 집성촌이자 문중 묘 1,077기가 모여있어 우리나라 고유의 장묘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묘역을 지키는 7,000여 그루의 노송과 재실이 묘지와 어우러져 한옥마을숲을 이룬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와 역사가 보전된 살아 있는 박물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을 찾았다.

500년을 이어온 묘역 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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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 운전면허시험장 부근에서 보문산 뒷편으로 휘감아 돌아가면 동구 이사동을 만날 수 있다.
아담한 한옥마을과 시원하게 뻗은 울창한 소나무들의 자태가 어우러져 한옥마을숲을 이룬다.

산림청의 2012년 전통마을숲 복원사업, 대전광역시 2016년 충청유교문화권 개발사업 등 유교민속마을로 조성되고 있는 동구 이사동. 은진송씨 집성촌인 이 마을 곳곳에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받은 소나무 7,000여 그루가 둘러서 있어 빼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한 마을에 한 문중의 묘소가 1,077기가 모여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독특한 장묘문화. 특히 공원묘지와 달리 산의 능선을 따라서 자연적으로 묻힌 형태의 묘가 하늘을 닿을 듯 장관을 이룬다.
이곳은 본래 목사공 송요년의 묘와 재실이 있는 윗사라니 마을과 송담 송남수의 묘역이 있는 곳을 아랫사라니 마을로 불리었다가 이두 마을이 합쳐져 지금의 행정구역상 이사동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사동이 독특한 문중문화를 간직하게 된 것은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요년과 동생 송순열은 풍수지리에 밝았다고 한다. 어느 날 동생이 형 송요년에게 묫자리로 좋은 두 동네를 추천해주었다. 바로, 대전 동구 사성동과 이사동이다. 사성동은 높은 벼슬을 하는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지만, 대가 끊길 수 있다. 이사동은 뛰어난 인물은 없지만 가문을 빛낼 인물이 간간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자손은 날로 번창할 곳이었다. 목사공 송요년은 장손이니 대가 끊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사동을 선택했다.

 

후에 이사동을 형에게 양보한 송순열의 상여가 사성동으로 향했는데 움직이지 않고, 다시 이사동 쪽으로 옮기니 그제야 움직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499년 목사공 송요년이 이사동에 묻힌 이후,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차례로 묻히게 되면서 55만 평의 넓은 임야 위에 현재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묘와 함께 조상을 모시는 16채의 재실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질곡의 세월 속 우리나라 장묘문화와 역사를 말하다

목사공파의 파주인 송요년은 회덕 송촌에 처음으로 자리 잡은 쌍청당 송유의 큰손자였다.
문과에 급제한 후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송요년은 평소에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서 살아서는 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명당에 묻혀 자손이 번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윗사라니 마을에는 송요년의 묘와 함께 그를 모시는 재실인 사산분암이 묘역 아래 자리 잡고 있다.

이사동이 역사와 문화적 가치로도 큰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묘역마다 자리한 석물도 큰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5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만큼 묘역 앞 석물들도 당시의 장묘문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송요년의 묘역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석물이 있는 의미 있는 곳으로,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집 안의 선조를 모시기 위해 그때 당시 최고의 석공들과 명필가들이 만든 석물을 사용했다.
묘 앞에 비석을 표석이라 하고, 표석의 머리에 얹은 것을 옥개석이라 한다. 표석 앞에 놓인 돌은 혼유석으로 무덤 안에 계신 혼령들이 나와 놀기도 하고, 제사음식을 먹는 곳이기도 하다. 또, 팔각형 석물은 장명등이라 하는데, 환하게 무덤을 지키는 의미도 있지만 무덤에 계시는 혼령이 멀리 출타했다 돌아올 때 이 장명등을 보고 돌아온다는 의미가 전해진다. 사람 모양의 석물은 문인석이라 하는데, 선비를 의미하고 모자는 벼슬을 나타낸다. 혼자 있는 이곳이 외롭지 않게 석물들을 세워두고, 조상을 기리고자 했던 후손들의 마음이 전해진다.

 

역사, 예술품의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송응서의 묘역을 찾았다. 송응서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송요년의 증손자이다. 그의 손자는 조선 후기 뛰어난 문인인 동춘당 송준길이다.
송응서의 묘역은 17세기 초에 건립되었는데, 묘역 앞 석물들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무덤 앞 지붕 모양을 한 옥개형 가첨석은 경기 이남에서 최초로 장식된 것이다. 병조판서의 자리에 오른 송준길은 할아버지 송응서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자신이 높은 벼슬에 오른 것을 조상의 덕으로 돌렸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상징하는 거북이를 새겨 넣었고, 손자들을 잘 보살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잉어를 조각해 넣었다.

우리가 품어온 이야기와 앞으로 품어갈 이야기

아랫사라니 마을은 오래된 소나무 숲이 특히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이곳에는 송담 송남수 묘역과 대전광역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월송재가 있다.
송남수 묘역과 함께 네 개의 묘역이 나란히 있어 장관을 이룬다. 송남수는 송요년의 증손자로, 대덕구 중리동에 위치한 쌍청당 대종가에 살았다. 그는 생전에 벼슬길보다는 전국 유명산천을 두루 답사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은진송씨 가문의 기초를 정립하고, 아랫사라니 마을에 하사 묘역을 새롭게 확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후 소실된 쌍청당을 복원하고, 향촌 활동에 앞장섰다. 송남수 묘역 밑에는 송담공파의 재실인 절우당이 자리한다. 소나무, 국화, 매화, 대나무를 자신의 벚이라 하고 주변에 이를 심었다. 절우당은 본래 송남수가 후학을 가르치던 학당이자 친구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한 곳이기도 했다.
절우당 아래에는 작은 한옥으로 이루어진 재실들이 자리한다. 그중 월송재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급제한 후 판관 등을 지낸 월송재 송희건이 지은 재실이다. 시에서 지방 문화재의 가치를 지키고, 완전한 한옥 형태를 만들기 위해 지은 초가집도 한옥의 고즈넉한 풍경을 더한다.

 

눈길 닿는 곳마다 역사가 있고, 발길 닿는 곳마다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이사동은 그렇게 500년의 역사와 오랜 전통과 함께 우리가 잊고 지냈던 조상의 얼과 가치를 이어가는 곳이다. 대전시에서는 이사동의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자 전통 유교마을조성을 추진 중이다.이곳에 자리한 높고 푸른 소나무만큼이나 선조들의 뜻을 받들려는 후손들의 푸른 마음이 바쁜 현대인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한다. 오랜 전통을 지켜야만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있다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