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ETRI의 영광은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영광이다. 지금은 종적을 감춘 CDMA나 이름조차 생소한 TDX가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이상 대표성과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ETRI의 오늘을 보여준다. "IT 강국을 만든 것도 ETRI, IT 강국을 망치고 있는 것도 ETRI"라고 서슴치 않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이다.
왜 이런 상황이 됐을까. 지난해 취임한 이상훈 원장의 분석은 이렇다.
"TDX나 D램을 개발하던 시절에는 선진국의 제품을 따라 잡으라는 명확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어떤 수를 써서든 그걸 만들면 칭찬 받았죠. 그 과정에서 연구원 개개인의 마인드는 주문형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데는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변했고, 문제까지 직접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갑자기 어느 순간 앞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되니까 어디로 갈지 모르게 된 겁니다."
세상이 변했는데, ETRI가 이를 따라잡아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와 ‘퍼스트 무버(선도자)’ 논란이 ETRI에서도 축소판으로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갑자기 맨 앞에 서게 된 사람들의 실패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오죽하면 1등도 해본 놈이 한다고들 할까. 하지만 한국과 ETRI는 더 이상 패스트 팔로어의 위치를 지키는 것도 쉬운 상황이 아니다. 중국이 턱 밑까지 추격해왔기 때문이다. 모방을 기본으로 하는 패스트 팔로어의 특성을 감안하면, 투입할 수 있는 자본과 인력의 규모가 다른 중국은 한국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이다. 물론 중국 역시 언젠가 인도라는 패스트 팔로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한국의 유일한 선택은 퍼스트 무버가 되는 것 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앞장서 가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개발해도, 뒤따라오는 곳이 없으면 쓸모없는 기술이 된다. 예산과 인력을 쏟아 부었는데 쓸모없는 기술이 되면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혜안과, 선도적으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추진력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모두 한국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부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