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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하는 조선성곽의 꽃,
수원화성을 걷다

경기도 수원화성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아버지(사도세자)가 이루지 못한 개혁을 이뤄 백성을 위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정조는 49세(1800년)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 마지막 개혁 군주인 정조의 못다 핀 꿈이 응축된 ‘수원화성’.

2016년은 수원화성 축성 2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의 성(城) 중 완성도와 예술성에서 최고의 성으로 꼽히면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을 걸으며,
백성들과 함께 백성을 위한 도시를 창조하고자 했던 정조의 이상과 염원, 애민정신을 느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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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최첨단 건축기술이 집약된 건축물

인류 역사에서 성(城)은 당대 기술과 예술의 결정체다. 우리나라에서 완성도와 예술성을 고려해 최고의 성을 꼽자면 단연 ‘수원화성’이다. 수원화성은 1794년 1월에 착공해 1796년 9월에 완공된 수원의 읍성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산 아래에 있던 관청과 민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시키고 이곳에 행궁과 함께 화성을 축성하였다. 성곽은 둘레가 약 5.7km, 높이가 4~6m로, 실학자 유형원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약용이 설계하였고, 석재와 벽돌의 병용, 화살과 창검,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가졌다.
수원화성은 거중기와 유형거 등의 신식 장비로 공사가 이루어졌고, 전국에서 최고의 기술을 지닌 장인들이 소집돼 지어졌다. 동원된 인원만 70여만 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사였다. 또한, 수원화성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정약용의 거중기와 유형거다. 실학자 정약용이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고안해 사용한 유형거는 일반 수레 100대가 324일 걸려 운반해야 할 짐을 70대로 154일 만에 운반하였다. 또한 거중기 11대를 이용해 10년이 걸릴 화성의 건축 기간을 2년 9개월로 단축한 기록이 있다.

 

화성은 대부분 화강암을 쌓아 축조됐다. 중요 방어시설은 벽돌로 쌓아 올렸다. 돌과 목재와 함께 벽돌이 건축 재료로 본격 활용되면서 이전의 재료에서 만들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조형물이 탄생한 것이다.

효심과 애민정신, 법고창신의 정신이 깃든 성

화성 앞에 도착해 처음 만난 신풍루(新豊樓).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는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신풍루 앞에서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열린 무예24기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예24기는 조선 정조대왕 시대에 완관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790)」에 실린 24가지 기예를 말하는데,
총 1,026개의 다양한 동작과 다종의 무기를 갖추고 있어 그 모습이 변화무쌍하며 크고 간결하여 호쾌하고 장중한 멋이 느껴졌다.
공연을 보고, 본격적으로 성 안으로 들어갔다.
 

화성은 4개의 성문과 5개의 암문, 2개의 수문, 2개의 은구, 2개의 장대, 2개의 노대, 3개의 공심돈, 4개의 각루, 1개의 봉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 정조는 우리의 전통을 지켜가되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성을 만들었다. 그래서 화성은 동·서양의 군사시설 이론이 잘 반영되어 있으면서 방어기능이 뛰어나, ‘성곽의 꽃’이라고 불린다. 또한 축성에 관한 모든 기록을 「화성성역의궤」에 남겼고, 이 책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수원화성 축성 종합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화성성역의궤」는 그 내용만으로도 중요한 학술자료가 되지만, 정교한 활자나 높은 수준의 인쇄술을 잘 나타낸 표본적인 서적으로도 귀중하다고 한다. 더욱이 이 책은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책 자체로 200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성 안쪽으로 들어가자 화성 안의 또 다른 궁궐인 화성행궁을 만날 수 있었다. 행궁은 왕이 전란, 휴양, 참배 등으로 지방에 행차해 잠시 머무는 곳을 말한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융릉을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 평소에는 관아로 사용했다. 건립 당시에는 600여 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행궁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인해 소실됐다. 현재는 다 복원된 형태이며, 낙남헌만 유일하게 당시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행궁에 들어서 제일 먼저 정당인 ‘봉수당’이 나왔다.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으며 정조가 수원행차시 머물렀던 곳으로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정조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왕실잔치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봉수당을 지나 오른편에 있는 ‘낙남헌’으로 향했다. 국왕의 행차 시에 사용했던 행사용 건물인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유일하게 당시 건물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다. 낙남헌 앞 담장은 높이 세우지 않고 열어놓아 언제든 백성들이 찾아와 국왕에게 억울한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아름다움은 적을 두렵게 한다
‘성의 미적 가치’

행궁에서 올려다보니 팔달산 정상에 서장대(성 안팎을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지휘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서장대에 올라 내려다보면 수원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서장대를 바라보고 난 후, 화성의 북쪽문인 장안문으로 향했다. 장안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서울의 숭례문보다도 큰 규모다. 수원화성의 또 하나의 특징은 보통 다른 성들은 남문을 정문으로 쓰는데,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라는 점이다. 이유는 서울에서 출발해 수원에 도착 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이 바로 장안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안문에서 나와 수원천을 지나면서 화홍문을 만날 수 있었다. 7개의 수문에서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흐르면 무지개가 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화홍문을 지나 성벽을 따라 걸었는데, 성벽에도 조선의 과학과 건축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특징 중 하나가 건축 자재로써 처음으로 벽돌을 도입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벽을 쌓았던 화강암과 함께 검은 빛 벽돌을 성벽 건축에 사용하면서 화성의 곡선미를 살려 더욱 견고하고 위엄 있게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방화수류정 바로 밑에서 만난, 화성에서 새로운 성곽의 축조정신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하며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 주는 망루인 ‘공심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원화성(華城)에서만 볼 수 있는 공심돈은 다른 망루와 달리 툭 튀어나오고, 가운데가 비어있는 것이 독특했다.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인 ‘방화수류정’. 51개소에 이르는 화성의 각종 시설물 중에서 백미는 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의 하나인 방화수류정이다.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르는’이라는 이름처럼 성벽에 우뚝 솟은 방화수류정 아래 인공연못이 자리한 모습은 한 폭의 산수화로 손색이 없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 기능과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닌 이곳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를 갖고 있어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성곽을 채 반밖에 돌아보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원화성은 조선성곽과 이웃나라 성곽이 지닌 장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설물을 고안한 성곽 건축의 결정체라는 걸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지형과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도 않으며, 꼭 있어야 할 자리에 해당 기능을 가진 시설물을 배치한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016년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와 정신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며 성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