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37년 몸담았던 ETRI에서 정년을 마친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반평생을 보낸 ETRI를 떠나려니 많은 감정이 교차하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이 앞섭니다. 37년간 제 존재를 확인시켜준 ETRI에 감사하고, 함께 정열을 다해 연구했던 동료들에게 감사합니다. 언제나 곁에서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가족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한편으로는 저의 교만과 위선, 경솔과 나태, 욕망과 이기심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동료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창의적인 혜안과 본이 되는 연구열정, 어려움을 해쳐나가는 지성인의 용기, 아픔을 달래주는 사려 깊은 마음이 모자라 후배 여러분의 귀감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세계 최초, 최고의 기술을 개발해 국가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리라 다짐했었건만 연구성과가 그러하지 못해 ETRI에 죄송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럼에도 행복합니다. 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최고의 연구결과를 만들기 위해 정열을 쏟았기에 행복했고, 훌륭한 동료들과 의지하며 함께할 수 있었기에 더더욱 행복했습니다. 때로는 깊은 시련에 빠져있는 저를 따뜻하게 다독여주던 동료들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후회 없이 정년을 마칠 수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Q. 특히 기억에 남는 추억이나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경희의료원 병원의료 정보시스템을 개발할 당시 팀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밤을 새우는 일도 허다했고, 세 끼니를 전부 병원 식당에서 해결하고, 온수도 나오지 않아 찬물로 씻어가며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예비군 동원훈련이 기다려질 정도였으니까요.
경희의료원에서 최초로 성공하자 순천향대학병원, 강남시립병원, 원자력병원, 필동성심병원 등 병원의료 정보시스템 구축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각 지방에 있는 시·도립병원들과 소규모 의원까지 자동시스템 도입이 확산되면서 수년 동안, 그야말로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땐 ‘집에 간다’는 개념이 없었어요. 어쩌다 집에 가면 잠깐 눈을 붙인 후에 옷만 갈아입고 다시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죠.
한번은 필동성심병원 시스템을 개발하던 중이었는데, 당시 임신 중이던 아내가 진통이 와서 그 병원에 입원을 했던 겁니다. 보호자가 필요해 안내방송으로 저를 찾았는데, 저는 까맣게 모르고 프로그램을 짜는 데 정신이 다 팔려있었죠. 결국 아이를 낳은 다음 날에야 비로소 출산 사실을 알고 달려갔죠. 아직까지도 아내가 그날 일을 얘기하며 서운해 하는데 제 탓이니 백 번이라도 미안하다고 해야지요.
Q. ETRI 재직 시절 주력했던 연구와 성과에 대해 들려주세요.
KIST에 입소해 처음 맡았던 프로젝트가 기업 MIS(Management Information Systems) 개발이었습니다. 기술적인 것보다 어려운 문제는 기업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로기준법, 소득세법 등 관련 법규들까지 다 알아야만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부담도 컸습니다. 단돈 1원이라도 급여가 잘못 지급되면 큰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 4명의 연구원이 한 달 동안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끝에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여러 회사에 일괄적으로 적용가능한 급여계산 프로그램 패키지도 개발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의료정보관리 시스템 개발이었습니다. 1976년 의료보험법이 개정되면서 환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진료부터 입·퇴원수속이나 원무까지 병원 업무를 전산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의료보험법 세부조항들을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의료진이 수기로 작성한 처방전이나 차트를 해독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당혹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결국 시스템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86 아시안게임’ 및 ‘88 서울올림픽’ GIONS(Game Information On-line Systems) 개발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올림픽 시스템 개발도 공부할 것이 만만치 않더군요. 프로그램을 짜려면 20여 개 종목의 경기규칙을 다 알아야 하니까요. 시스템을 개발한 다음 전국체전에 시험적으로 도입했는데 성능이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신문에 ‘발보다 느린 컴퓨터’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죠. 하지만 지속적으로 성능을 업그레이드시켜 ‘86 아시안게임’ 때는 국내는 물론 세계 언론에서 호평을 받았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2001년에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TV 및 휴대폰 등에 들어가는 핵심 SW인 ‘조립형 실시간 OS‘ 및 ‘임베디드 SW 플랫폼‘ 개발을 주도한 일, IPTV 산업의 초석을 마련한 홈서버를 세계최초로 개발한 일, SMMD기반 유비쿼터스 홈 미디어 서비스 시스템 개발 사업을 기획한 일, 오류 발생으로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켰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진단하여 처리방안을 수립했던 일, 최근에는 간판에 빔을 쏘면 그 상점의 정보가 제공되는 스마트 간판 기술 개발에 성공한 일 등 다양한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IT 경쟁력을 높이는 데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을 영예롭게 생각합니다.
아마도 저는 ‘연구 복’을 타고 난 모양입니다. 물리적으로 일이 많기도 했지만, 유망하고 중요한 연구들이 많이 맡겨졌습니다. ETRI에서 쌓은 연구경험들은 과학자로서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Q. ETRI에 대한 바람과 직원들에게 당부말씀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조직이 잘 되기 위해서는 인재를 중시해야 하며 인사를 현명하게 해야 합니다. 즉 진정한 인재가 누구인지 옥석을 가려내고, 이에 상응하는 형평성 있는 대우가 따라야 합니다. 형평성이라는 동등한 자를 동등하게, 동등하지 않은 자를 동등하지 않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주는 사람, 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인재의 참 모습일 것입니다. 이처럼 열심히 노력하고 결실을 맺는 인재들이 인정받는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하며, 이들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까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보다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조직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정책이 바뀔 때마다 연구방향이 좌지우지된다면 앞날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ETRI는 정책 변화나 트렌드에 영합하지 말고, 본래의 정체성(Identity)에 부합하는 특화된 연구에 매진해야 합니다.
직원들에게 바라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뚜렷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끼를 만들려면 어디에 쓸 도끼인지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용도도 모르면서 무조건 커다랗게 도끼를 만들어 놓으면 괜한 힘만 들였을 뿐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용도에 맞게 만들어야 상품이 됩니다. 뚜렷한 목표가 있다면,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독창성입니다. 독창성은 지식만 갖고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책상에 앉아만 있지 말고 발로 뛰며 현장에서 부딪힐 때 세계적인 기술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자신의 아킬레스를 숨기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고 어디에 약한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공유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단점을 보완해 보다 훌륭한 결과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함께 경험을 나누고 의지하는 훌륭한 연구문화를 다시금 이룩해, 새로운 도약을 이뤄내는 ETRIman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