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주의
“전문가처럼 규칙을 배워야 예술가처럼 규칙을 깰 수 있다.”
입체주의를 대중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다.
원근법의 규칙을 깨고 새로운 시선을 화폭에 담기까지. 어떤 도전이 입체주의를 탄생시켰을까?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원근법 기반의 화풍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도가 등장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폴 세잔의 정물화가 그 시작이었다. 그의 정물화는 사진을 찍은 듯한 사실적인 그림과는 달랐다. 원근법의 개념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여러 날에 걸쳐 정물화를 그리던 폴 세잔은 매순간 바라보는 시점으로 정물을 그렸다. 사람이 다양한 시선에서 물체를 바라보고, 그것을 조합해 판단한다는 사실을 그림에 처음 적용시킨 것이다.
폴 세잔은 말년에 모든 자연은 원통형, 구, 삼각뿔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잘 표현한 것이 <생트 빅투아르 산>이다.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주제로 1890년에서 1906년 사이 18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세세하게 관찰한 산을 기하학적인 도형을 활용해 나타냈다. 이후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가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게 된다.
입체주의(Cubisme)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08년이다. 마티스(Henri Matisse)가 새로운 화풍으로 그린 브라크의 연작 <에스타크의 풍경>을 보고 ‘조그만 입방체(Cube)의 집합’이라고 평한 것에서 유래됐다.
야수파 화풍의 그림을 그려오던 브라크가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린 그림들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때문이었다. 1907년 피카소의 작업실에 방문한 브라크는 막 완성된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았고, 충격을 받게 된다. 팔과 다리가 부자연스럽게 그려졌고,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의 코는 옆모습에서 보일법한 모양으로 그려지는 등의 실험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브라크와 피카소는 새로운 화법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며 입체주의를 발전시켜나간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3차원상에 있는 사물을 2차원의 캔버스로 옮기기 위해 기하학적 도형을 사용한다. 여러 측면에서 바라본 사물을 단순화하기에 적합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사물을 구분하여 삼각형과 사각형 등의 모양으로 해체하고, 이를 다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브라크의 <여우>를 보자. 알 수 없는 형체가 조각나있다. 마치 조각난 퍼즐이 흩어져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브라크와 피카소는 주로 단순한 대상을 위주로 작업했다. 다양한 색채를 활용하기보다는 갈색, 녹색, 회색 등 단조로운 색상을 사용했다. 형태를 분석하는데 복잡하지 않도록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를 분석적 입체주의(1907~1912) 시기로 구분한다.
이후 파편화된 그림이 지나치게 구조화되어 모호해지자 브라크는 최초로 파피에 콜레(Papier Colle)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파피에 콜레는 신문지, 잡지와 같은 인쇄물들을 잘라 붙이는 방식으로, 그림 속 대상이 무엇인지 구분시키기 위해 도입됐다. 그리고 이는 종합적 입체주의(1912-1914)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파피에 콜레 기법을 잘 활용한 작가는 후안 그리스(Juan Gris)였다. 브라크와 피카소를 통해 입체주의를 접하게 된 스페인 출신의 화가였다. 후안 그리스는 종이에서 벗어나 나무조각, 유리, 모래와 같은 다양한 요소를 활용해 콜라주 기법으로 발전시켰다. 더불어 다양한 색채를 활용해 이전 입체주의 작품들과는 다른 경쾌한 그림을 선보였다. 그는 종합적 입체주의를 발전·완성시킨다.
입체주의는 기존의 원근법을 탈피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그려낸 혁신적인 화풍이었다. 도전적이었던 입체주의 화풍은 훗날 미래주의, 오르피즘, 신조형주의 등 다양한 미술사조에 영향을 미친다. 신선한 형태로 우리에게 낯선 감상을 안겨주는 입체주의 작품. 오늘은 이 작품들과 함께 차 한잔의 여유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