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은 눈길을 어디에 두어도 산의 경치를 마주할 수 있고, 높은 지대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 지역 어디나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넉넉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민들은 옷감을 쪄서 말리는 포백업과 메주를 담가 파는 훈조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농사를 짓기에 마땅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과 외적을 막고 평평한 땅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는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그래서인지 삼국시대에도 오랫동안 세력 확장의 요충지가 되었다.
특히, 창의문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배경으로 유명하다. 반정군은 창의문을 부수고 들어와 선전관을 베고, 도성 안에 진입하여 순식간에 창덕궁을 점령했다. 또, 1968년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남하했을 때 창의문을 통과했는데, 당시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경무관)과 정종수 경사가 교전 중 순직하였다. 이에 창의문으로 가는 길에다가 그들의 동상과 추모비를 세워 드높은 애국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이처럼 역사의 굴곡과 세월을 함께한 창의문은 꽤 오래 전부터 우리 백성의 고단한 삶을 지켜봤고, 이 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셀 수 없는 사연들이 오고 갔다. 현재는 창의문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후손들이 이 길을 드나들고 있다.
흥선대원군 별서는 조선후기 중신이었던 김흥근이 별장이었다가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된 1863년에 대원군이 인수하였다.
별서에는 많은 매력이 있다. 울창한 수목이 만드는 아름다운 경관과 적당한 고도로 이곳에 서면 종로구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인왕산의 정기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는지, 대원군은 이곳을 매매하길 원치 않는 김흥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아들인 고종을 이곳에 묵게 하였다. 이에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수 없다하여 김흥근이 결국 별서를 포기하자, 운현궁 소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대원군은 이곳에서 예술 활동을 했고, 임시거처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인왕산 자락을 배경으로 위엄있게 자리한 흥선대원군 별서 안에는 석파정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는데, 별서보다도 정자가 더 유명하다. 정자는 대원군이 별서를 사용하면서부터 자신의 호를 따서 '석파'라고 이름 붙여졌다. 청나라풍의 문살 문양과 평석교의 형태를 통해 한국적이면서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전한다. 돌다리를 따라 우거진 나무 사이로 보이는 석파정으로 향하니, 발걸음이 겸손해진다. 한국의 전통 정자와 달리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무리하여 건축적으로 매우 특이한 양식이라고 한다.
흥선대원군 별서는 7채의 건물이었지만, 현재 안채, 사랑채, 별채, 석파정 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별서 옆에는 멋들어지게 가지를 뻗쳐, 한편으론 신비롭기까지 한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60호인 노송(老松)이 운치를 더하고 있다. 노송을 보면 굳은 절개와 꿋꿋한 의지를 가졌던 선비들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자연을 노래한 옛 선비의 심성을 느껴보았다.
구름길을 따라 몇 분 걷다 보니 너럭바위에 도착했다. 코끼리 형상을 닮아 코끼리 바위라고도 하는 너럭바위는 바위산인 인왕산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바위를 따라 빗줄기가 폭포수를 대신하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넓은 바위 앞에 서자 영험한 기운이 전해지는 듯하다. 바위는 소원을 이뤄주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이 바위 앞에서 득남을 빌어 소원을 이루었고, 아들의 출세를 기원한 한 어머니의 기도도 들어주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바위의 비범한 생김새에 이곳을 찾은 사람 누구나 간직하고 있던 소원 하나를 몰래 바위에게 전하고 간다.
너럭바위 옆에 물을 품은 길이 이어진다.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마실 나온 개구리들이 길동무가 되어준다.
흥선대원군 별서를 뒤로하고, 구불구불한 부암동의 골목골목을 누볐다. 길마다 갤러리와 카페들이 소소하게 자리하고 있는 걷기 좋은 길. 비를 피할 수 있는 카페가 있고, 소소하게 또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골목길이 고스란히 추억으로 다가오는 곳. 부암동은 그런 곳이다. 부암동은 완연한 가을이 찾아 왔을 때, 또 다른 얼굴로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담장 너머 비 사이로 담쟁이 넝쿨이 싱그럽게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