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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中 무등산을 거닐다

광주광역시 의재미술관 & 증심사

신록이 짙어가는 계절. 미세먼지와 꽃가루를 씻어내는 봄비를 뚫고 빛고을 무등산에 당도했다.
모처럼 내리는 넉넉한 빗줄기로 샤워를 즐기는 나무들을 따라 걷다 보면
한국 남종 문인화의 마지막 대가인 의재(毅齋) 허백련 선생을 기념하는 미술관과 유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마치 처음부터 무등산의 일부였었던 것처럼 조화롭게 지어져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은 의재미술관,
그리고 주변에 남아있는 의재 선생의 흔적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하늘, 땅, 사람을 사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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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 허백련 선생(1891~1977)은 20세기 우리나라 남종 문인화의 대가다.
의재 선생은 삼애사상(三愛思想 ; 愛天·愛土·愛人)을 바탕으로
무등산 자락 춘설헌에 기거하면서 우리의 산과 들을 그려 수많은 명작을 완성했다.
같은 세대의 신예들이 근대적 작풍을 추구한 것과 달리, 예법에 충실한 화격을 고수한 의재 선생은
산수화와 문인화를 통해 전통 남종화 정신과 그 기법을 철저하게 계승하였다.
또한 1945년 해방 후에는 피폐된 농촌중흥을 위해 농업기술학교를 설립, 지도자를 육성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 의재 선생은 평생 품고 살았던 삼애사상이 깃든 터에 잠들어 있다.
생전에 그토록 아끼던 무등산, 차, 나무, 그리고 사람 사이에서 그의 호 의재(毅齋)처럼 '굳세고, 가지런하게'.

의재의 정신을 품다, 의재미술관

의재 선생은 세속적 성공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겸허하고 청빈한 사상가, 실천적 계몽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때문에 문인이나 남종화라는 말의 의미조차 희미해진 오늘날, 선생의 예술과 삶은 더 큰 가치를 지닌다.
1974년 3월 어느 봄날,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부부가 의재 선생의 거처인 춘설헌을 찾았다.
"난초는 동양인의 마음과 같다는데, 대하기 까다롭다는 뜻입니까?"라는 물음에 선생은 "아니지요, 조용하고 깊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난을 선비정신이라고 하지요"라 답했다. 덧붙여, 난은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필요하다는 것, 습도가 조금만 안 맞으면 죽고 만다는 것, 그래서 '잠수함 속의 흰 토끼'(게오르규가 시인의 역할을 비유한 표현으로 사회가 병들면 시인이 먼저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는 뜻)는 난과 일맥상통하고 있노라 말했다.

 

이러한 의재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데 중점을 둔 의재미술관은 선생의 작품과 무등산의 조화를 건축물에 담아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2001년 10월 19일 광주에서는 유일하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건물이 되기도 했다. 미술관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조상의 얼, 예술을 고이 간직한 하나의 문화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월의 붓끝과 마주하다

북종화가 오랜 세월동안 차곡차곡 수련을 통해 내공쌓기를 중요시 하며, 국가의 큰 행사를 기록하는 등 도화원 출신의 화가들이 그린 전문적인 그림이라면,
남종화는 산수화의 2대 화풍 가운데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번뜩이는 직관과 영감을 바탕으로 수묵과 담채를 써서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 치중한다.
그리는 이의 뜻과 정신을 담은 남종화는 조선 중기 이후의 한국화에 강한 영향을 남겼다.
남종화는 대체로 문인들에 의해 그려졌으므로 남종 문인화라 불리기도 한다.
따라서 진서체, 초서체, 윤서체 등 중국의 필체를 연마하는 것은 남종 화가들의 일상이기도 했다.
문인화는 문자 그대로, 그림에서 '문자'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질 때에야 비로소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받았다.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넘어 그 속에 담긴 의미, 시를 짓는 일에 무게를 둔 것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속 미술관, 그러한 미술관 내부에 전시된 화폭들 사이에서 잠시 동안 편안한 호흡을 했다. 누렇게 바란 화선지는 지난 시간을 머금고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전해주는 듯 했다. 예법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심화시켰던 작가의 예술세계는 붓이 닿은 곳곳마다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전시장 안은 온통 산천수목으로 싱그러웠다.
절로 느려지는 걸음으로 걷다가 의재 선생의 막내 동생인 허행면 선생의 작품들과 마주했다. 의재 선생의 작품에 가려져 허행면 선생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겨 이곳에서 전시해 알리고 있다고. 허행면 선생의 초기 작품은 형 의재 선생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화법으로 표현되고 있으나, 이후 유화를 비롯한 서양화를 배우고 익혀 점차 자신만의 화법을 찾아 나갔다. 눈에 의지하여 그리는 서양화와 관념적, 마음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동양의 문인화가 한 데 어우러져 동서양이 공존하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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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경치에 취하다, 문향정

의재미술관에 방문한 사람이라면 자연에 취해 으레 문향정에 들러 다과를 즐기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문향정은 본래 의재 선생이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실습용 축사로 지었던 건물이다. 후에 이 건물은 춘설차의 보급 장소로 쓰이게 되었으며, 기존의 노후화된 건물을 해체하고 같은 규모로 개축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깊고 은은한 향이 일품인 춘설차의 성분은 한마디로 신선(神仙)의 기운이라 전해진다. 춘설빵은 머리와 눈을 맑게 하는 효능,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감싸는 신비의 기운을 지닌 춘설차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춘설차 문화관으로도 이용되는 문향정의 건물 앞쪽에는 물레방아로 향하는 수로가 길게 지나고 있어 그야말로 산 좋고 물 좋은 경관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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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맑게 하는 무등산의 정맥, 증심사

문향정을 나와 약 5분쯤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 증심사에 다다랐다. 정유재란과 한국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을 통해 현재는 대웅전, 오백전, 비로전, 지장전, 취백루, 범종각, 산신각, 일주문, 사천왕문, 정묵당, 행원당, 자인당 등 여러 전각이 어우러져 있는 증심사.
조선시대 세종 25년(1443년) 김방(金倣)이 오백나한을 봉안하기 위하여 증심사를 짓고 국가와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사찰은 정유재란 때 불탔고, 광해군 때 또다시 대규모의 중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물들이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도 매번 참화를 피한 오백전만이 증심사 내의 유일한 조선조의 건물이다. 기나긴 세월 무등산을 지켜온 오백전은 단아한 아름다움에 위엄까지 두루 갖춘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추적추적 비가 연신 내리는 가운데 통일신라시대 창건 당시 건립된 3층석탑부터 고려후기 제작된 5층석탑, 조선시대 건립된 범자7층석탑까지,
시대를 달리하는 석탑들을 차례로 마주하며 이곳에 깃든 수많은 염원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어머니들이 나라의 안위와 가족의 평안을 빌었을지 생각하니 딱딱한 석탑들이 이곳을 찾는 모두와 함께 숨 쉬고 있는 듯 했다.
많은 이들이 광주와 무등산을 함께 떠올린다.
그렇게 증심사는 무등산의 능선 한 자락에 걸터앉아 역사의 굽이굽이를 겪으며 산의 일부가 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기도객들이 찾는 무등산의 정맥인 증심사.
마음을 맑게 하고 마음을 증득하다는 그 이름에 걸맞게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염원과 함께 숨쉬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