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선생은 세속적 성공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겸허하고 청빈한 사상가, 실천적 계몽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때문에 문인이나 남종화라는 말의 의미조차 희미해진 오늘날, 선생의 예술과 삶은 더 큰 가치를 지닌다.
1974년 3월 어느 봄날,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부부가 의재 선생의 거처인 춘설헌을 찾았다.
"난초는 동양인의 마음과 같다는데, 대하기 까다롭다는 뜻입니까?"라는 물음에 선생은 "아니지요, 조용하고 깊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난을 선비정신이라고 하지요"라 답했다. 덧붙여, 난은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필요하다는 것, 습도가 조금만 안 맞으면 죽고 만다는 것, 그래서 '잠수함 속의 흰 토끼'(게오르규가 시인의 역할을 비유한 표현으로 사회가 병들면 시인이 먼저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는 뜻)는 난과 일맥상통하고 있노라 말했다.
이러한 의재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데 중점을 둔 의재미술관은 선생의 작품과 무등산의 조화를 건축물에 담아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2001년 10월 19일 광주에서는 유일하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건물이 되기도 했다. 미술관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조상의 얼, 예술을 고이 간직한 하나의 문화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속 미술관, 그러한 미술관 내부에 전시된 화폭들 사이에서 잠시 동안 편안한 호흡을 했다. 누렇게 바란 화선지는 지난 시간을 머금고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전해주는 듯 했다. 예법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심화시켰던 작가의 예술세계는 붓이 닿은 곳곳마다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전시장 안은 온통 산천수목으로 싱그러웠다.
절로 느려지는 걸음으로 걷다가 의재 선생의 막내 동생인 허행면 선생의 작품들과 마주했다. 의재 선생의 작품에 가려져 허행면 선생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겨 이곳에서 전시해 알리고 있다고. 허행면 선생의 초기 작품은 형 의재 선생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화법으로 표현되고 있으나, 이후 유화를 비롯한 서양화를 배우고 익혀 점차 자신만의 화법을 찾아 나갔다. 눈에 의지하여 그리는 서양화와 관념적, 마음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동양의 문인화가 한 데 어우러져 동서양이 공존하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었다.
의재미술관에 방문한 사람이라면 자연에 취해 으레 문향정에 들러 다과를 즐기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문향정은 본래 의재 선생이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실습용 축사로 지었던 건물이다. 후에 이 건물은 춘설차의 보급 장소로 쓰이게 되었으며, 기존의 노후화된 건물을 해체하고 같은 규모로 개축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깊고 은은한 향이 일품인 춘설차의 성분은 한마디로 신선(神仙)의 기운이라 전해진다. 춘설빵은 머리와 눈을 맑게 하는 효능,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감싸는 신비의 기운을 지닌 춘설차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춘설차 문화관으로도 이용되는 문향정의 건물 앞쪽에는 물레방아로 향하는 수로가 길게 지나고 있어 그야말로 산 좋고 물 좋은 경관이 펼쳐지고 있다.
문향정을 나와 약 5분쯤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 증심사에 다다랐다. 정유재란과 한국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을 통해 현재는 대웅전, 오백전, 비로전, 지장전, 취백루, 범종각, 산신각, 일주문, 사천왕문, 정묵당, 행원당, 자인당 등 여러 전각이 어우러져 있는 증심사.
조선시대 세종 25년(1443년) 김방(金倣)이 오백나한을 봉안하기 위하여 증심사를 짓고 국가와 백성의 편안함을 기원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사찰은 정유재란 때 불탔고, 광해군 때 또다시 대규모의 중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물들이 불타 없어졌다. 다행히도 매번 참화를 피한 오백전만이 증심사 내의 유일한 조선조의 건물이다. 기나긴 세월 무등산을 지켜온 오백전은 단아한 아름다움에 위엄까지 두루 갖춘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