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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숨결 따라
궁(宮)에 숨겨진 과학을 만나다

경복궁 & 창덕궁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
경복궁 동쪽에 이궁으로 조성돼 200여 년 동안 왕의 통치 공간으로 사용된 창덕궁.
조선의 뛰어난 건축미학이 숨어 있는 이 두 궁궐에는 옛 선조들의 과학 정신이 깃들어있다.
오는 3월 2일부터 4월 4일까지 약 한달 간 이루어지는 경복궁 야간개장 관람을 위해 예매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고 한다.
야간개장을 앞두고 조선시대 눈부신 과학기술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거닐며 찬란했던 과학문명을 느껴보았다.

조선시대 건축 미학과 뛰어난 과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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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태조 4년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워진 조선 최초의 궁궐이자 최고의 궁궐로 손꼽힌다.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시경(詩經)>의 한 구절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만년에 큰 경복일레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경복궁에 들어서면 근정전(勤政殿)이 위엄 있게 자리하고 있다. '근정'이란 부지런히 백성을 위해 정치에 힘쓰라는 뜻이다.
경복궁은 45도 좌측에서 보아야 온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좌측에서 보면 곡선이 있는 궁과 뒤쪽의 산이 어우러져 건축과 자연의 조화를 이룬다.

근정전은 밖에서 보면 중층이나 안은 확 트인 통층으로 되어 있다. 옥좌 뒤로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가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해는 임금을, 달은 왕비를 나타내고, 오봉은 왕이 다스리고 보살펴야할 국토를 뜻한다. 나라의 주요한 행사를 열던 근정전 앞뜰인 조정에는 신하들이 자리 잡고 섰던 품계석과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어서 만든 울퉁불퉁한 박석이 깔려있다. 조정을 걷노라면 근정전의 근엄함에 마음이 엄숙해지고 박석으로 인해 걸음 또한 조심스러워진다. 조정에 박석을 깔아놓은 것에는 조상들의 지혜가 숨겨있다. 햇빛이 강한 날 눈부심을 막고, 비가 많이 내려도 물줄기가 급하게 모이지 않아 빗물이 흐르는 속도를 줄여주었다. 또 가죽신을 신은 대신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비가 오거나 햇볕이 강한 날에는 마당에 박아놓은 고리에 차일을 걸어서 치기도 했다.

 
궁궐에는 왕실가족들이 집무를 보던 전각들 이외에도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신하들이 일을 하던 궐내각사라는 공간이 있다.
현재 수정전만이 남아있고 궐내각사에 있던 전각들이 거의 불에 타 사라졌다.
수정전은 세종대왕 시절 집현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조선시대 중 과학문명이 가장 빛났던 시기를 꼽으라면 세종대왕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추운 겨울 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집현전에 등불이 켜 있는 것을 본 세종대왕이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어 잠든 신숙주의 몸에 덮어 주라 이른 유명한 일화가 있는 장소이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과학기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던 세종대왕 때에는 다양한 과학기술들을 후세에 남기게 되었다.
특히 세종대왕 시절 유명한 과학자 장영실은 많은 발명품을 남겼다.

수정전 건물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만들었던 보루각이라는 건물이 있던 자리를 나타내는 표지석을 확인할 수 있다. 보루각은 조선의 새로운 표준시계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보루각에서 알리는 시보신호에 따라 백성들의 일상이 시작되고, 물품들이 오가며, 성문이 열리고 닫혔다. 장영실의 주요 발명품인 자격루 이외에도 그릇에 빗물을 받아 비가 내린 양을 잴 수 있도록 한 측우기,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찰하는 관측기구인 혼천의와 햇빛을 받아 생기는 그림자의 위치로 시간을 재는 해시계인 앙부일구가 있다. 앙부일구의 반구형 모양은 마치 가마솥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후기에는 손목시계처럼 작게 만든 앙부일구를 사람들이 휴대하고 다니기도 했단다. 그밖의 문화재로 풍기대를 확인할 수 있다. 풍기대는 바람의 세기와 함께 바람이 부는 방향을 관측하기 위해 깃발을 꽂아두었던 받침돌이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시기 홍수와 가뭄 못지않게 풍향과 풍속의 측정 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과학기술이 연구되었을 장소에서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과학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기 발상지, 고즈넉한 시간 속을 걷다

경복궁에는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인 경회루가 있다.
경회루는 왕이 외국사신을 접대하거나 공신을 위한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경회루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된 곳이다.
연산군 시절 유흥을 위해 궁궐로 징발한 기생들을 ‘흥청’이라 하였는데, 이 기생들이 풍악을 울리던 곳이 바로 경회루이다.
재미있는 역사 속 이야기를 들으며 거닐다 보니 어느새 경회루를 지나 고종과 명성황후가 특히 사랑했던 장소인 향원정에 다다랐다.
경회루가 크고 고풍스러운 느낌이라면 향원정은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향원정은 건청궁 앞에 있는 정자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기를 밝혔던 전기 발상지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전구를 알게 된 고종이 직접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전기공사를 맡겼다고 한다. 에디슨 전기회사는 향원정이 있는 향원지의 물을 끌어다 발전소를 건설했다. 이로써 호롱불을 켜지 않아도 건청궁이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빛날 수 있었다. 건청궁의 전기는 일본, 중국보다 2년이나 앞섰다고 하니 고종의 근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환하게 빛나는 조선시대의 전구 불빛을 상상하니 신비로움마저 들었다. 향원정의 주변을 천천히 거닐다보면 물이 고요하게 흘러감을 알 수 있다. 흘러가는 물길 하나도 허투루 두지 않았던 조선시대 과학의 숨결이 전해졌다. 향원정 열상진원샘에서 들어오는 물은 너무나 맑고 시원하여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열상진원샘에는 물길을 두 번에 걸쳐 직각으로 꺾어 놓은 계단 형태의 구조를 볼 수 있는데, 세차게 뻗어가는 물줄기가 이곳에서 두 번 꺾이면서 고요한 물줄기가 되는 것이다. 자연을 과학기술로 활용하는 조상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궁궐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멍하니 궁궐을 거닐다보면 한 가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부시와 오지창이다. 궁궐은 나무로 만들어진 건축물이기 때문에 화재와 물, 짐승의 분뇨와 같은 물질에 매우 취약했다. 또 새의 분비물은 나무를 부식시켜 건물을 금방 상하게 만들었다. 부시는 새가 앉아 새똥을 싸지 못하도록 한 그물망이고, 오지창은 새가 처마나 지붕에 앉지 못하도록 만든 작은 창이다. 이렇듯 건축물에서도 숨은 조상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궁궐

한편 경복궁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아름답고 넓은 후원 때문인지 다른 궁궐보다 왕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롭게 조성된 종합 환경디자인 사례이면서, 한국적인 공간 분위기를 품고 있는 건축물로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현존하는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도 세계유산 등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창덕궁은 경복궁 다음에 위치하는 별궁으로 이궁(離宮)이라고도 하고,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 동궐이라고도 불렸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하들이 설계한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왕(태종)의 의도에 따라 설계되었다. 경복궁은 왕의 처소인 강녕전과 국무회의실인 사정전, 근정전이 도열해 있는 구조인데, 이는 일할 때 효율적일 지는 몰라도 일상적으로 생활하는데 있어서는 조금 답답할 수 있다. 반면 창덕궁은 언덕에 지어 바닥이 평탄한 곳이 많지 않은데, 이러한 불규칙한 지형을 이용해 남쪽에는 건물들을 배치하고, 북쪽 구릉에는 너른 후원을 조성하였다. 자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해 조성한 덕분에 격식적인 궁궐건축의 전형에서 탈피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 창덕궁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처럼 지형지세를 고려해 건물을 짓다 보니 구조가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선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의 앞마당은 반듯한 직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모양이다. 중심을 관통하는 축이 없다는 점도 경복궁과 크게 다른 점이다. 하나의 중심축 대신 돈화문과 인정전, 선정전 세 곳이 축을 이루고 있다. 즉 다양성을 띄면서도 무질서하지 않은, 규범과 자연스러움을 동시에 가진 뛰어난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창덕궁 인정전에서도 박석을 확인할 수 있는데, 경복궁의 박석과는 달리 반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일제가 창덕궁 인정전의 박석을 걷어내고 죽은 자의 무덤에 까는 풀인 잔디로 바꾸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1994년 박석을 복원하려 했지만 구할 길이 없어 화강암을 반듯하게 가공한 돌을 깔게 된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거닐며 조선시대 과학의 발달부터 아름다운 건축미학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특히 건축물로써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고자 했던 경복궁의 장엄함과 건축물과 자연의 조화를 느낄 수 있었던 창덕궁의 아늑함을 기억에 새기며
나라의 발전을 위해 애썼던 우리 선조들의 과학에 대한 열정과 지혜로움에 새삼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