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물드는 애기단풍이 손짓하는 곳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위치한 백양사는 단풍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특히 이곳의 단풍은 다른 곳보다 잎의 크기가 작아 ‘애기단풍’ 이라고 불린다. 그 이름에 걸맞게 애기의 손바닥처럼 앙증맞고, 애기의 볼처럼 새빨갛다. 이렇게 작은 단풍들이 층층이 겹쳐져 백암산을 뒤덮으면 온 천지에 불이 난 것처럼 온통 붉은빛이다.
백암산 입구에서 백양사로 가는 길은 애기단풍뿐만 아니라 600년이 넘은 갈참나무의 군락지가 좌우로 펼쳐져 있어 가을산의 느낌을 더해준다. 우리를 인도하듯 길게 늘어선 갈참나무는 긴 세월을 산 덕에 굵직하고 믿음직스런 줄기를 자랑한다. 다른 나무들이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이 오롯이 느껴진다. 게다가 군데군데 섞여있는 노란색 은행나무와 탐스럽게 열린 감나무도 가을정취를 더한다.
백양사 입구에 다다르자 누각 하나가 서 있다. 백암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그 양쪽으로 계곡이 합쳐지는 지점에 자리한 ‘쌍계루’. 이곳은 특히 사진작가들과 방문객들의 촬영 포인트로 유명한데, 계곡의 수면에 반사된 백학봉과 애기단풍이 어우러져 마치 자연이 그려낸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그 앞으로 계곡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 위에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쌍계루 위에 오르니 선선한 가을바람이 스친다. 벽면에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선생 등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의 풍경을 읊은 시판이 걸려있다. 정몽주는 ‘쌍계루에 부쳐(寄題 雙溪樓)’라는 시제로 백암사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는데, 당시 그가 모시던 공양왕과 편안한 마음으로 오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다.
쌍계루를 지나면 느티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이 나무가 성황당입니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죠. 성황당은 마을 주민들이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에요. 주로 토속신앙에서 많이 보던 모습이라 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백양사는 마을 주민들과 화합하기 위해서 성황당을 만들었죠. 이곳 주민들과 소통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고광춘 문화관광해설사는 백양사에 성황당이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했다.
천년고찰 백양사
백양사는 호남 최대의 고찰이지만 법당은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다. 1400여 년 전인 백제 무왕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절로, 원래 이름은 백암사였다. 이후 고려 때 정토사로 바뀌 었다가 조선 선조 때부터 백양사(白羊寺)로 불렸는데 그 유래가 무척 재미있다.
“한 고승이 법회를 열었는데 하얀 양이 백암산에서 내려와 열심히 설법을 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법회가 끝나면 숲으로 사라졌대요. 7일 동안 이어진 법회가 끝난 밤, 스님 꿈에 하얀 양이 나타나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요.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습니다. 이제서야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극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얀 양은 스님께 공손히 절을 올리고 사라졌대요. 이튿날 스님이 마당으로 나가보니 하얀 양이 죽어있더래요. 이후부터 하얀 양이 득도한 곳이라 해서 백양사라 불린다고 전해집니다.”
보통은 사찰의 대웅전 앞에 탑이 새워지기 마련이지만, 백양사에는 특이하게도 석탑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백암산은 정기가 무척이나 셉니다. 옛날에는 그 기가 세서 이곳에 들어와 기도를 하던 사람들이 다 도망을 갔다고 해요. 그래서 백암산 정기를 차단하기 위해 8층 석탑을 대웅전 뒤편으로 세웠죠. 그 둘레에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는 문구를 새겨놓았는데, 올바른 생각·행동·견해·사유·언어·행동·생활·삼매로, 우리가 지켜야 할 마음가짐이죠. 이를 읽으면서 탑 주위를 3번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요.”
백양사 앞마당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대문 같은 것이 서 있다. 진영각 앞으로 세워진 ‘괘불대’가 그것인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이 괘불대와 관련이 있다. “괘불이란 그림으로 그려 걸어 놓은 부처를 가리켜요. 특히 모인 신자가 많을 경우 법당 밖에서 법회나 의식을 거행하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부처를 볼 수 있도록 괘불을 구멍이 뚫린 지지대에 걸어놓죠. 그것을 ‘괘불대’라고 해요. 행사가 크면 많은 인파가 모여 들어 복잡하게 움직이잖아요. 그 모습을 보고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이라는 뜻의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이 생겨났죠.”
가을이 전해주는 풍요로움백양사로 오르는 입구에는 학봉 선석원(鶴峰 禪石圓)이 있는데, 백양사의 방장(方丈)인 지선스님이 40여 년간 수집한 돌들을 전시한 사찰 최초의 수석전시관이다. 이곳에는 천여 점의 달마석과 사유석이 전시돼 있는데, 지선스님이 남한강·한탄강·섬진강·제주도·거제도·임자도 등 국내는 물론, 미국·중국·일본·미얀마·네팔·파푸아뉴기니 등 10여 개국을 다니며 직접 수집하거나 기증받은 것이다. 특히 돌 하나하나에는 자연이 빚어낸 갖가지 문양들이 신비롭다. 수행하고 있는 스님, 달이 뜬 풍경, 동자승의 모습 등 돌에 새겨진 무늬를 감상하며 관람할 수 있다. 한편 학봉 선석원에서는 개원기념 ‘오백나한상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 이 특별전은 11월 30일까지 계속된다.
백양사의 맑은 정기를 받고 내려가는 길에 당도가 높아 ‘꿀맛’이라는 장성의 대봉감을 맛보려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장성은 백양사의 붉게 물든 애기단풍과 함께 황금빛으로 영글어 가는 ‘감’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백양사 입구만 벗어나도 여기저기 감을 수확하는 농부들의 분주한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감나무 가지마다 어른의 주먹보다 훨씬 커 보이는 감들이 퍽이나 먹음직스럽다. 마을 어귀 곳곳에서 주렁주렁 감을 매달아놓고 볕에 말리는 풍경은 단풍 못지않은 장관이다.
감을 직접 재배하여 판매한다는 농부가 구수한 사투리로 인사를 건네며 우리를 반긴다. 농부가 선뜻 내민 대봉감을 하나 받아서 먹어보니 투박한 겉모양과는 달리 그 맛이 ‘꿀’처럼 달다.
숲이 뿜어내는 맑은 기운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달고 빛 고운 감으로 풍요로움을 맛보았다.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리라. 해마다 가을이면 애기단풍이 손짓하며 반기는 이곳이 생각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