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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2 201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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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가 머물렀던 풍경

봄에는 동백으로 가을에는 꽃무릇으로 철마다 붉은 비단옷을 꺼내 단장하는 선운산은 어느 계절 하나 건너 뛸 수 없는 경치를 자랑한다. 원래는 도솔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백제시대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있어 선운산이라 널리 불리고 있다. 호남의 내금강이라고도 불리는 선운산은 크게 4가지 코스로 등반할 수 있는데, 특히 제1코스는 선운사를 비롯해 도솔암과 낙조대가 포함되어 있어 짧은 시간 안에 선운산 속에 담긴 매력적인 비경을 모두 감상하기에 좋다.

관광안내소에서 선운사까지는 누구라도 쉽게 걸을 수 있도록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 약 800m 정도에 이르는 이 길은 오래전 미당 서정주가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그도 동백을 보러 왔다가 때가 일러 꽃구경은 하지도 못하고 돌아간 봄날이 있었나보다. 그날의 아쉬움이 느껴지는 듯한 시 [선운사 동구]는 선우사의 입구에 시비(詩碑)로 제작되어 여행객들의 걸음을 붙잡는다.

“禪雲寺 고랑으로/ 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디다.”
- 서정주 [선운사 동구]

시비에서 시선을 돌리자 선운사 일주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운산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 ‘도솔(兜率)’은 도솔천의 준말로 불교에서 열반한 스님이 미래의 미륵불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하늘 궁전을 뜻한다. 일주문에 적힌 ‘도솔산선운사’ 현판은 창건당시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 그리고 수도를 위한 24개소의 굴이 있는 대가람(大伽藍)의 위엄을 짐작케 한다. 이곳에서 2~3분만 걸어가면 부도전(浮屠殿)이 나온다. 많은 부도들 중에 조선시대 대명필가로 알려진 추사(秋史) 김정희가 글을 쓴 부도가 있다. 조선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불교의 중흥을 일으킨 화엄종주(華嚴宗主)인 백파율사(白坡律師)의 부도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길

선운사에서 걸음을 옮겨 도솔암으로 향한다. 도솔천 계곡을 따라 걷게 되는 이 등산로는 2009년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54호’로 지정했을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옆을 바라보면 붉은 꽃무릇이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고개를 들어보면 수줍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하늘을 수놓고 있다.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넓고 평탄한 흙길이 이어져 있다. 마치 옛날 시골길을 걷는 것만 같다. 적당히 섞여드는 풀 냄새와 흙내음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일상에 찌들어 있었던 불온한 마음들을 밀어내는 것만 같다.

소설가 정찬주는 ‘인간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기분’이라고 이 길을 표현했다. 그가 이곳을 하늘로 가는 길이라 표현한 것은 단지 이 숲길이 불가에서 극락을 상징하는 도솔암의 내원궁까지 이어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철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옷을 갈아입으며, 덜어내지도 더하지도 않고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도솔암 서쪽 바위 칠송대 암벽에는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기다렸다는 듯 서있다.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마애불상은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부처라고 한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와 두툼한 입술은 일반적인 불상에서 느껴지는 자애로움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붉은 향기 맴도는 가을 속으로

도솔암을 지나고 나니 평탄했던 산세가 급격히 변한다. 이전까지는 산행이 쉬운 지산이었다면, 천마봉까지는 골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골산 특유의 기암괴석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은 가쁜 걸음을 잊게 할 만큼 장관이다. 골산 사이를 헤치고 도착한 곳은 아찔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낙조대이다. 두 기암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서해마을의 풍경도 그림 같지만 저녁 무렵의 낙조는 선운산의 단풍이 하늘까지 번진 듯 고운 빛을 자랑해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시야가 좋은 날에는 변산반도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낙조대를 지나 오른 것은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천마봉이다. 봉우리를 딛고 서자 가을바람이 반갑게 달려들고, 맞은편에는 도솔암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하늘 아래 울긋불긋 물든 도솔계곡을 내려다보며 가을이 왔음을, 가을의 한 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음을 새삼 느껴본다.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 햇살을 안고 흐르는 개울물, 붉은 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꽃무릇까지, 선운산의 아름다움은 가을에 절정을 맞는다. 추색을 찾아 선운산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일대에 선운리, 곰소항, 내소사 등의 명소가 있어 발걸음 닿는 곳마다 즐거울 뿐 아니라, 굽이치는 산세와 눈을 맞추고 느긋한 시간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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