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터와 미술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강력한 연산 능력으로 수천 건의 연산을 빠르게 처리하고,
현존하는 보안 코드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컴퓨터가 있다.
바로 인류에게 신세계를 열어줄 양자컴퓨터다.
기존의 컴퓨터로는 해결하지 못했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양자컴퓨터.
이 양자컴퓨터를 구성하는 큐비트가 예술이 됐다.
컴퓨터의 기본적인 원리는 비트(bit)라는 최소 단위에 있다. 이 비트는 0 또는 1의 값을 가지는데, 컴퓨터는 이 0과 1만을 가지고 연산한다. 수없이 많이 모인 비트 연산을 통해 우리는 컴퓨터로 문서 작업부터 영상 제작, 영화감상 등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자컴퓨터는 어떤 최소 단위를 가지고 연산하는 것일까? 바로 큐비트(qubit)다. 큐비트는 양자역학의 원리가 적용됐다는 것에서 큰 차이를 가진다.
큐비트는 양자 중첩이라는 특성을 활용한다. 중첩은 비트와 같이 0 또는 1중 하나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0과 1이 겹쳐있는 상태다. 0 또는 1뿐만 아니라, 그 사이의 값도 가질 수 있다. 중첩 현상을 통해 큐비트는 많은 정보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어 병렬 계산이 가능하다. 큐비트는 중첩 외에도 얽힘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두 큐비트가 얽혀 있을 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현상을 말한다. 거리와 무관하게 빛보다 빠른 속도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하나의 큐비트가 0의 상태인 것을 확인하면 나머지 큐비트의 상태도 자동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얽힘의 특성을 이용해 빠른 연산을 가능하게 만들고, 강력한 보안 통신에도 사용된다.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양자의 특성을 예술과 융합시킨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여기, 2019년도부터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양자나노과학연구단(이화여자대학교 기초과학연구원)이다. 연구단은 양자를 대중에게 친근하게 소개하고자 미술 공모전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큐비트를 주제로 미술 공모전을 진행했고, 다양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양자나노과학연구단장상을 수상한 이나연 작가의 ‘큐비트 전달자’는 큐비트가 사용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표현한 작품이다. 무수한 원형들이 겹쳐있는 형태이며 작품의 진가는 직접 관람했을 때 발현된다. 관람객은 작품 곁에 마련된 헤어드라이어로 작품에 열을 가할 수 있다. 열을 가한 작품은 검은색이었던 원형이 보라색과 파란색으로 변화한다. 감온안료를 사용해 극적인 효과를 준 것이다. 작가는 열을 가하는 행위를 ‘관측’의 상징으로, 큐비트를 형상화한 원형의 색깔이 변하는 과정은 양자 중첩과 얽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캄캄한 어둠이 짙게 내린 밤,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사람이 보인다. 그런데 조금은 독특한 배치다. 한 명의 뚜렷한 사람 뒤로 반투명한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다. 역동적인 액션을 취한 채 말이다. 권민경 작가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라는 작품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건물 곳곳에 있는 사람은 모두 동일하다. 큐비트의 중첩 현상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야근하는 사람의 다양한 액션을 중첩해 현실화한 모습과 현실화하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게 작업했다. 역동적인 액션은 다양한 가능성을 의미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무실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한계를 그려냈다.
큐비트의 불확정성과 얽힘을 표현한 작품도 있다. 바로 임성연 작가의 ‘얽힘의 실재’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패턴은 회절을 패턴화한 것이다. 이 패턴들은 불규칙적으로 엉키면서 형태가 배경이 되고, 배경이 형태가 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세상과 개개인의 자아 또한 하나의 진리로 정의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양자컴퓨터의 세계를 작품으로 감상해 보니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하다. 큐비트 이외에도 양자 기술과 관련된 다양한 작품을 양자나노과학연구단 홈페이지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 앞으로도 계속 캔버스 위에 펼쳐질 다양한 작품들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