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71 March 2021
햅틱(haptics)은 그리스어로 ‘만지는’ 이라는 뜻의 형용사 ‘hapesthai’ 에서 유래한 말로
각종 디지털 기기에 진동이나 힘, 충격을 발생시켜 사용자가 촉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일컫는다.
지금이야 흔한 기술이지만, 햅틱 기술이 적용된 휴대폰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차갑게만 느껴지던 디지털 기기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햅틱 기술의 역사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햅틱 기술은 1970년대 벨 전화연구소의 마이클 놀에 의해 발명되었다. 이후 1989년, 윌리엄스 일레트로닉스(Williams Electronics)에서 진동으로 반응하는 햅틱 피드백 기능이 최초로 접목된 핀볼 게임기 ‘어스쉐이커(Earthshaker!)’를 선보였다. 이를 기점으로 1990년대 콘솔 게임 제조사들이 햅틱 기술을 사용한 게임기들을 대량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이후 햅틱 기술은 항공기 및 전투기 시뮬레이션, 가상영상체험 영화, 게임 분야로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최근에는 멀리 떨어진 물체의 형상과 움직임, 무게, 굳기, 질감 등을 느낄 수 있는 햅틱 장갑이나 사물의 부피와 무게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무선 전신 햅틱 복장이 개발되기도 했다. 특히, 2000년대 중반 들어서는 휴대폰 터치스크린에 적용되며 대중들에게도 널리 친숙한 기술이 되었다.
비록 거대하거나 화려한 기술은 아니지만, 햅틱 기술이 가져온 변화는 컸다. 햅틱 기술이 적용되지 않은 밋밋한 터치스크린은 현실감이 없어 직관적인 사용이 어려웠다. 이 때문에 실수나 오작동이 잦아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나 햅틱 기술이 적용되면서 디지털 기기에 현실감이 더해지는 한편 오작동률이 줄고 동작 효율이 높아졌다. 현재 햅틱 기술은 게임기와 터치스크린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로봇, 의료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 접목되어 디지털 기기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해를 거듭하며 햅틱 기술도 진화와 발전을 거듭했으나, 현재 햅틱 기술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지금의 햅틱 기술은 기기 자체에 동일한 진동효과가 전달되어 부분별로 세밀한 촉감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상용화된 햅틱 기술의 구현 방식과 관련이 있다. 햅틱 기술은 모터에 달린 무게추의 움직임으로 진동을 만들어낸다. 기기 전체가 모노 스피커와 같이 떨리므로, 사용자가 화면 어느 곳을 눌러도 같은 진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다. 최근에는 레이저를 이용하여 순간적인 온도 변화에 따른 충격파로 진동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용되는 레이저 가격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데다가 소형화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어 상용화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나아가 최근에는 동일한 진동 피드백을 넘어 세밀하고 다양한 진동 피드백을 구현하는 기술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터치스크린 기기 사용이 확산되고 코로나로 인한 원격작업이 늘어나면서 햅틱 기술이 적용되는 분야가 스마트폰뿐 아니라 가전, 의료기기, 게임 등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자연히 정밀성과 안정성을 갖춘 기술 개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햅틱 기술의 한계 극복 필요성이 커지던 중에 ETRI 연구진이 LED 광신호를 이용해 부분 진동을 구현하고 다양한 진동 자극을 만드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해당 기술은 낮은 출력의 광신호를 진동으로, 즉 빛에너지를 흡수하여 열에너지로 전환하는 원리를 이용했다. 광-열 변환층이 코팅된 특수 필름에 빛을 쬐면 가열·냉각과 함께 소재의 열팽창률에 따라 필름이 변형·회복되면서 진동을 만드는 방식이다. 개발한 기술은 지난달 10일, 미국 화학회(ACS) Applied Materials and Interfaces 학술지 표지 논문으로 게재되며 기술력을 널리 인정받았다.
연구진은 단위로 9개의 구역을 가진 3 x 3 형태의 LED 배열을 만들어 각 구역에서 넓은 주파수 대역으로 정밀한 진동 표현이 가능함을 기술적으로 증명해냈다. 이로써 비싼 레이저 광원 대신 소형 LED를 여러 개 사용하여 각각 독립적으로 진동을 만들어내는 디스플레이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소형 LED는 기존의 레이저 광원보다 가격이 1/10,000에 수준으로 저렴하여 획기적인 가격 절감이 가능하다. 또한, 향후 크기를 쉽게 대면적화 할 수 있어 다양한 분야에 응용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가 된다.
본 기술을 적용한 디스플레이는 손가락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촉감을 낼 수 있다. 또한, 다이얼을 돌리는 촉감, 버튼을 누르는 촉감, 미는 촉감 등을 동시에 구현해 낼 수 있다. 최근 자동차 전장은 버튼이나 다이얼 같은 전통적 조작 장치에서 터치스크린 하나에 여러 제어기능을 통합하는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 여기에 해당 기술이 적용된다면 조작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이 돌아와 더욱 직관적인 조작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ETRI가 개발한 기술은 자동차 전장, 터치스크린 기기, 전자기기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될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시각장애인이 점자만으로는 온전히 TV리모컨을 사용하지 못하고 디스플레이에서 나오는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것을 보완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햅틱 기술이 고도화되면 터치스크린을 통해 온라인 쇼핑몰에서 옷의 재질을 느끼며 원격으로도 옷을 구매하고 실제 전투현장과 같은 충격과 떨림을 재현하면서 게임을 즐기는 등 마법 같은 미래가 머지않았는지도 모른다. 정보 취약계층의 원활한 소통을 돕고 더욱 실감나는 세상을 즐길 수 있는 햅틱 기술의 발전을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