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과 변주의 삶을 그리다
등단시인이자 화가라는 행정원으로서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가 있다. 이는 반복과 변주의 삶을 모토로 삼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처음 그림을 배울 때, 붓을 든 적이 없다는 주인공. 그는 남들처럼 미술의 기초인 드로잉부터 시작한 게 아니라 작품 비평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먼저 구축해 추후 스스로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발전했다고 귀띔한다. 수업에서 받은 교훈을 동료들에게 전파하려는 김순선 책임행정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시인 등단 스토리는?
“1997년도 그러니까, 꼭 이십 년 전에 계간지 문예지인 [21세기문학]으로 데뷔했지요. 제가 첫 번째로 당선되었는데, 당선 시가 [전파]였어요. 과학을 정통서정과 연결한 시였는데, 문예지의 창간 목적과 부합했던 것 같아요. 지금 보면 좀 감상적인 것 같아요. 당시 심사위원이 황동규 시인과 김주연 평론가였어요. 그 후로 황동규 시인과 가끔 대전에서 뵙곤 했어요. 더러 황동규 시인을 모르는 분들이 있던데, 소설 [소나기]의 황순원 소설가가 아버지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시더군요.”
그의 등단 작품인 ‘전파’는 전파처럼 사방 어디든 날아가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을 담았다. (“얼마나 더 떨어야 / 네게로 날아갈까... 소리 없는 소리를 날린다”[전파/김순선]) 시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글이라는 매개체로 세상에 대해 의미 있는 반복과 변주를 일삼는 행위다. 이처럼 삶에서도 반복과 변주를 모토로 삼으며 고인물이 되지 않고자, 그는 시에서 나아가 그림에까지 도전을 확장했다.
화가로서의 도전계기는?
“따지고 보면 시는 문자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요. 문자로 이미지를 드러내니까요. 그런 점에서 그림은 좀 더 직접적이지요.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현상학을 공부했는데, 그 영향으로 보는 것의 너머나 안에 있는 본질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준 화가가 폴 세잔이에요. 그는 기존 작가와 달리 대상을 소재로 다루지 않고 주제로 다루려했어요. 같은 산을 여러 장 그렸는데, 이는 산의 본질에 대한 추구였던 거예요. 어쩌면 화가가 그리는 게 아니라, 산이 화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제게 있어 그림은 공부이며, 글쓰기이며, 생각하기입니다. 이런 생각이 기존 화단에 어찌 받아들여지는지 지속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중입니다.”
김 책임은 그림을 공부하다가 계룡산 수통골에서 우연히 마주친 ‘지의류’에 반해, 이를 자신의 미술적 뮤즈로 삼았다. 그 역시 처음에는 바위에 낀 이끼로만 알았던 지의류가 지구상에 삼만 종 이상이 있다는 것에, 지의류가 세상의 융합을 담은 상징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이를 그림에 담기로 결심했다.
지의류에 대한 개념과 이를 활용한 미술을 소개한다면?
“폴 세잔의 생각은 후대 화가들에게 귀감이 되었지요. 그에게 사과와 산이 그랬던 것처럼, 제게는 지의류가 그렇지요. 생물을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원생생물과 원핵생물이 그 내용입니다. 이중에서 지의류는 원생생물에 해당됩니다. 지의류는 아직 우리에게 낯선 대상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흔히 보던 것이라는 게 놀랍지요. 보고도 못 보는 것이 바로 지의류이기에 보고도 못 보는 무엇을 떠오르게 하지요. 지의류는 수억 년을 살아왔는데, 놀랍게도 공해에는 약해 도심에선 발견할 수 없어요. 이는 제게 많은 의미를 전해줍니다. 물질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종으로 느껴지니까요. 의미도 의미지만, 형태와 색깔이 무척 멋지고 아름답지요. 하여, 이를 미적으로 구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무엇보다 근현대 미술기법이나 과학기법이 동원되어야 그 구현이 가능하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재료를 이용하는 방법은 화가들마다 다르다. 돌가루를 입혀 질감을 표현하고, 음영 효과로 지의류를 발견한 장소에서 느낀 색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미술기법과 과학기법이 조화롭게 사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술가도 과학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와 미술은 내 인생의 [ ]다로 표현한다면?
“핵 주위를 머무는 [전자(電子)]지요. 더러 자유전자가 되어 떠돌기도 하지만, 어딘가에 머물기를 바라지요. 저의 인력이 전자를 끌어들였으면 해요. 저는 전자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음성이 되고 양성이 되기도 하지요. 들뜨기도 하고 차분하기도 하지요.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움직인다는 거예요. 사물을 이루기 위한 기본 전제가 에너지이기보다 어쩌면 빛 속도인지도 몰라요. 저는 전자와 더불어, 온전한 원자가 됩니다.”
취미생활이 업무에 끼친 영향?
“예술은 근본에 대한 고찰을 하는 습관을 길러 줍니다. 땅을 깊게 팔려면 주변을 어느 정도 넓게 파야 깊게 팔 수 있는데, 연구 개발을 위한 지식을 쌓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분야를 파기 위해서 다양한 지식을 아는 게 중요한데 이는 ‘근본’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령 연구원들이 전파를 연구하지만, 왜 ‘전파’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상 너머를 보고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해도 ‘근본’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행정원이지만 ETRI의 일원으로서 나아가기 위해, 과거 양자역학의 이론을 익혀 이공계 박사와 자웅을 겨루기도 했습니다. ETRI가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넓고 깊게 ‘근본’부터 연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금 인력개발실에 근무합니다. UST업무와 인문학 과정을 맡고 있지요. 인력개발실은 근본적으로 연구원들의 창의력 향상을 근본 목표로 하지요. 이것이 연구개발에 밑거름이 되리라 믿습니다. 비록 행정적인 업무라 해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다르다고 봐요.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하는 일에 창의력이 더 녹아들었으면 해요.”
향후 계획?
“그간 개인전(초대전)을 서울을 비롯해 대전에서 열었지만, 전시를 통한 발표에 앞서, 내놓을 만한 좋은 작품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강의도 마찬가지구요. 작업에 충실하고, 자료에 내실을 다지는 것을 우선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언어 영재들을 대상으로 [언어분석]에 대한 강의가 있어요. 초등학생을 상대로 해야 하는데, 저로서는 사뭇 기대가 됩니다. 무언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누구에게나 쉬워야 하니까요. 제 말에, 붓 터치에 크고 작은 물결이 일기를 바랄 뿐이지요. ”
대전 영재학교에 예정된 그의 언어학 강의는 [마음에 가까운 말]을 주제로 한다. 그는 ‘마음에 가까운 말’이란 ‘논리’와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뜻한다고 밝혔다. 여기서도 어떤 분야든 철저하게 임하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가령 예술 분야에 도전할 때, 관련 지식을 박학다식하게 섭렵해 논리를 갖추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열었다. 예술인으로서도 행정원으로서도 독보적인 자취를 남기고자 노력하는 김 책임의 앞으로의 행보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