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현재 교수, 극작가, 연출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 건 아마도 대학 시절 저를 사로잡았던 이 한마디 때문이었을 겁니다. 질적인 비교우위를 통해 한 가지 길만을 택하기 위해 모두가 몰두해있던 그 시절, 가능한 한 ‘많이’ 사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할 거라는 이 말은 제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죠. ‘한 번뿐인 인생인데 왜 한 가지 일만 하며 평생을 보내야 할까?’라는 고민이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내 안의 잠재된 가능성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는데, 타인이 정한 질적인 기준에 따라 하나의 재능에만 창을 열어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계속해서 회의하면서 가능하면 많은 것을 해보며 살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오늘의 저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죠.
연극 대본을 쓰는 일은 어쩌면 다양한 인물들을 만들고, 상상 속에서 그들의 다양한 삶을 경험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는 작가보다 배우의 꿈을 먼저 꿨습니다. 평생 다양한 역할을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삶을 양적으로 사는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용기가 부족했는지, 배우는 꿈으로만 남았고, 대신 작가가 되는 것으로 대리 만족을 성취한 셈이죠.
교수로 강의하는 것 또한 제게 있어서는 일종의 배우 대리만족입니다. 매 시간 강의는 매번 무대에 서는 연기와도 같은데, 혼자 연출과 배우의 역할을 하는 환상적인 ‘모노드라마’입니다. 마치 무대에 서서 관객과 교감하듯, 학생들과 교감하는 순간은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어느 한 분야의 ‘장인’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잡인’이 되는 것, 그것이 기쁘게 살아가는 비결이란 걸 살아갈수록 더 확신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해서 다양한 일을 재미있게 시도해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경로당 폰팅사건>은 제가 가장 외로웠을 때 집필했습니다. 마음에 가둬둘 수 없을 정도로 사무치는 외로움을 바깥으로 표출해낸 것이 이 연극입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외로울 때가 있고, 그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요. 그런데 나 혼자 외롭다고 생각했을 때, 주변에 나와 같이 외로움의 방에 갇혀 사는 분들이 많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상상 속에서나마 소통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겼습니다. 처절하게 외로운 상황은 소통을 꿈꾸게 하는 행복한 자극입니다. 정말 외로울 때는 상대방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으로 다가오지요. 이때 외로움에 감사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외로움만이 소통의 창문을 열 수 있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대화하게 된다고요.
사실 <경로당 폰팅사건>은 극의 배경이 경로당일 뿐 노인분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노인 분들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 또한 외로움의 공간에 갇혀 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으로 들여다보면 젊은이들과 노인 분들은 동일한 세대일 뿐입니다. 세대와 세대 간의 갈등도 외로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경로당 폰팅사건>이 세대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 냈던 것도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제 연극은 대부분 소외된 계층이나 우리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인 분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었습니다.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많이 들을 수 있지만,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무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 진정한 삶의 본질이 숨겨져 있는데 말이죠. 작가는 자신을 표현할 기회나 능력이 부족한 무명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의 삶에 귀 기울여보면 우리 삶에 줄 수 있는 소중한 메시지가 분명 있거든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외로움의 이면에 대해 귀 기울일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요.
학생들이 저에게 조언을 구하고, 함께 소통할 때, 저는 교수라는 직업의 ‘맛’을 느낍니다. 나를 만족시키는 맛은 입에선 달콤할 수 있어도 마음까지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맛이야 말로 오래도록 가슴에 머무는 최고의 맛인 것 같습니다. 이런 맛을 느끼지 않고 하는 일은 맛없는 음식을 계속 먹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에서 오로지 배(돈)만 채우기 위해, 맛(보람, 행복 등)을 느끼지 못하고, 평생 아무 맛도 없는 일을 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수의 맛’, ‘연구의 맛’ 등. 자신의 일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 맛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해야 하지요. 그런데 뜻밖에 많은 직장인이 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의 ‘맛’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사람과 사람, 기술과 사람, 기술과 기술을 연결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단이 다를 뿐, 저는 예술로, ETRI는 기술로 소통한다는 똑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연구원 내에 계시는 분들도 서로 간의 가치를 나누고 소통하는 일을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저는 새로운 공연을 통해서 사람들과 계속해서 소통하고 싶습니다. 또, 앞으로 연구원분들과 대화할 수 있는 강의도 계속하고, 과학과 예술이 융합된 연극을 기획해보고 싶습니다. 한 가지 바람은 과학도 다양한 문화를 창출할 수 있도록 기획 단계부터 예술과 관련된 많은 분야와 융합했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트렌드를 좇아 융합한다면 이도저도 아닌 개밥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술, 과학 등 각 분야를 이해하고 시간을 들여,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조화로운 융합을 시도한다면 비빔밥과 같은 맛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전은 많은 연구원이 자리하고 있고, 교통의 요충지가 되는 ‘사통팔달’의 도시입니다. 대전이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잘 활용한다면 충분히 좋은 콘텐츠를 지속해서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역할을 ETRI와 같은 연구기관이 융합을 통해 이뤄내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분들이 행복을 위해 서로 공감하고 또,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