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궁남지는 백제시대 별궁 연못으로, 경주의 안압지보다 40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경주의 안압지가 통일신라 궁궐건축의 당당함을 보여준다면 부여 궁남지의 차분한 아름다움은 백제의 단아한 옛 멋을 느끼게 한다. 부여 궁남지의 역사와 관련해서 삼국사기에는 “무왕 35년(634) 3월에 궁남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무왕 39년(638) 봄 3월에는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기록되어 있어, 아마도 그 당시 연못의 규모는 뱃놀이를 즐길 정도로 지금보다는 훨씬 더 컸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연못은 1960년대 초까지는 그저 자연 습지로만 알려져 왔다가, 이후 왕궁의 후원이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복원사업을 통해 백제 무왕이 조성했을 당시의 모습과 흡사하게 정비, 보수공사를 하였다. 그후 1971년 연못 안에 포룡정(抱龍亭) 이라는 정자를 섬처럼 세우고 이를 잇는 목조다리를 만들어 연결하였다. 포룡(抱龍) 이란 명칭은 서동의 탄생 설화에서 기인하는데... 서동의 어머니가 어느날 달밤에 잠을 못 이루고 연못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그때 갑자기 연못에서 용이 나타나 서동의 어머니와 사랑을 나눴고, 그 후 열 달 뒤 서동을 낳았다는 것. 즉 '용을 품었다'는 의미로 '포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서동은 '용의 아들'인 셈이 된다.
무왕과 왕비의 사랑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듯, 연못에는 돌돌 말린 하트 모양의 연잎이 보인다. 카누를 타고 직접 연지 속을 누비는 이색 체험프로그램인 카누·연지탐험도 성황리에 운영중인데,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한편, 연못 한 켠에 서동의 생가를 꾸며 놓은 장소를 둘러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초월한 로맨스를 떠올리며 연꽃이 피어있는 산책로를 걸었다.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을 뿜어내는 연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져 마치 도를 닦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연꽃 하면 자연스레 불교가 떠오르는데, 그 이유는 늪이나 연못의 진흙 속에서도 맑고 깨끗한 꽃을 피워내고, 고상한 기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마치 연못 위에 알록달록한 등불을 켜 놓은 듯, 연꽃이 펼쳐놓은 황홀한 풍경을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능선을 따라 흙길을 걷다보니 영일루에 닿았다. ‘해를 맞는 누각’이라는 뜻의 영일루에 오르니 확 트인 시야에 가슴까지 시원하다. 비 내린 뒤의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부소산 특유의 진한 솔 향기와 함께 스쳐지나간다. 조금 더 천천히 백제의 숨결을 느껴보라는 부소산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
부소산 서쪽 백화정 아래에 있는 큰 바위, 낙화암에 도착했다. 그 아래로 백마강이 흐른다. 백제 의자왕 시절 당나라 군사가 침략했을 때 삼천 궁녀가 망국 백성으로 오랑캐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해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슬퍼하며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아 낙화암(落花巖)이라는 애달픈 이름이 붙었다. 낙화암 주변이 궁녀 3000명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기는 했지만, 화려했던 사비성의 마지막을 안타깝고 서럽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의 마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