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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없는 백제 박물관

공주 공산성 &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 웅진(熊津)!
충남 공주는 웅진시대(475~538)의 백제 유물과 유적이 많은 역사문화의 도시이다.
특히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대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공주에 도착, 약 1500년 전 백제의 숨결을 느껴봤다.

도읍을 지킨 성곽,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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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주 여행의 시작은 공산성부터. 고구려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자 백제는 475년에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538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중심이었던 웅진. 그리고 도읍지 웅진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성이 바로 공산성이다.
공산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금강을 가로지르는 금강교를 건너야한다. 역사와 문화는 강을 따라 발전한다고 했던가. 백제는 금강을 통해 중국과 교류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공산성 4개의 성문 중 현재 공산성 입구에 해당하는 금서루에 도착했다. 금강변을 따라 2,660m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성곽이 이어진다.
부드러운 흙길로 만들어진 성곽을 따라 백제의 역사를 만나는 본격적인 걸음을 시작했다.

 

공산성은 백제 때는 웅진성으로 불렀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웅진성 이외에도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길을 따라 올라가다 그 이름을 가지게 된 유래가 전해지는 쌍수정(雙樹亭)이라는 넓은 정자를 만났다.
쌍수정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몸을 숨겼던 곳이다. 인조는 산성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에 기대어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무나 기뻤던 나머지 자신이 기대었던 느티나무 두 그루에 문관 정3품에 해당하는 통훈대부(通訓大夫)라는 벼슬을 내렸고, 성곽에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웅진성, 공산성, 쌍수산성까지. 다양하게 불리었던 이름만큼이나 오랜 역사적 가치를 품고 있는 공산성이다.

금강 따라 흐르는 백제의 역사

쌍수정 앞에는 넓디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잔디밭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이곳은 백제 왕궁지로 여겨지는 추정왕궁지라 한다.
「삼국사기」에 임류각은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토대로 1980년대 추정왕궁지를 조사한 결과 건물 터를 비롯하여 연못,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쌍수정 동쪽에는 진남루가 자리하고 있다. 진남루는 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진남루에 올라서자 나무가 우거진 시원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원래 토성이었던 공산성은 조선 초기 지금의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진남루 역시 그때 세워졌는데,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고, 현재 건물은 1971년 전부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라 한다.
좁다란 성벽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경사가 가파르기도 하고 구불구불하기도 해서 걷는 재미가 있다. 지대가 높아 성벽 길에서 바라보면 햇빛에 반짝이며 찰랑거리는 금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 건너편에는 공주 신시가지와 능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강을 따라 백제시대 웅진과 현재의 공주가 공존하는 경이로운 절경을 만날 수 있다.

여섯 개의 무덤, 송산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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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맞은편에 아치 모양의 큰 문이 보인다.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 유적지구에 속해있다.
송산리 고분군에 들어서면 야트막한 구릉인 송산 중턱에 무령왕릉을 포함한 일곱 고분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웅진시대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지 않아 능의 이름을 1호분, 2호분 등 번호로 매겼다. 현재는 아쉽게도 실제 고분군을 보호하기 위해 입구를 막아두어, 모형전시관을 통해서 송산리 고분군 5호분과 6호분, 무령왕릉을 재현해놓은 모습을 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고분군 주변을 천천히 거닐며 고분군은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백제시대 평민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죽어서도 황금빛 찬란함을 누렸을 백제시대 왕족들은 자신들의 삶과 죽음이 후세에 역사적 가치를 남길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릿속에 남았다.

 

찬란한 역사의 비밀을 알려주는 무령왕릉

무령왕은 백제 제25대 왕으로 백제가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큰 혼란에 빠져 있을 때,
고구려와의 경쟁에서 종래와는 달리 적극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고구려와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다.
또, 농사에 필요한 수리 시설을 정비하여 백성들의 삶을 보살폈다.
송산리 고분군 중에서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무령왕릉. 때문에 무령왕은 더욱 백제의 역사적 가치를 가진 인물이 되었다.
 

무령왕릉은 1970년대 제5호분과 제6호분 내부에 스며든 유입수를 막기 위해 배수 공사를 진행하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때문에 도굴이나 붕괴 등의 피해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조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발굴당시,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총 4,600여 점에 이르는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유물 중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백제 문화의 가치가 담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모형전시관에서 무령왕릉의 내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무덤은 외부에서 무덤방으로 통하게 하는 통로를 지나 시신을 안치하는 널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무덤은 한 칸으로 만들어져 있고 벽돌이 쌓여져 있었다. 널방으로 들어가자 아치형태의 높은 천장이 눈에 띈다. 층층이 쌓아올린 벽돌에는 연꽃이 그려져 있는데, 1500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의 정교함에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또한 실제 무령왕릉은 내부 침수를 방지하기 위해 널길의 바닥면 아래에 외부 경사면을 따라 길게 배수로를 설치했다고 한다.
특히 무덤의 벽돌에 중국 남조의 양나라 양식을 본받았음을 밝히는 글귀가 있어 백제가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주. 금강과 함께 백제의 역사는 지금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