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곱씹게 되는 곳.
이곳에는, 외면하고 싶은 우리나라 식민지 역사가 고스란히 응축돼있다.
그 가슴 아픈 흔적들이 멋스러운 변신을 통해 문화와 예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뼈아픈 과거에서 우리가 취할 것과 버릴 것을 현명하게 구분지어
고전미와 현대미의 조화로 되살아난 ‘삼례문화예술촌’으로 떠나본다.
‘한섬이요, 두섬이요’ 가슴 절절한 소리
상처는 아물었지만, 끝내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흉터가 남았다.
세월이 흘러 눈물 젖은 흉터 위에 살포시 웃음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새살이 차올랐고, 곱게 꽃단장까지 했다.
이보다 더 놀라운 부활이 있을까. 최근 전라북도의 명소로 떠오른 ‘삼례문화예술촌’은 이렇게 탄생했다.
만경강 상류에 위치한 삼례읍은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한 만경평야 지역이다.
이런 지리적 조건은 일제강점기 시절 군산, 익산, 김제와 더불어
양곡수탈의 중심지이자 전위대 역할을 하는 가슴 아픈 과거를 남겼다.
이렇게 기름진 만경평야에서 자란 쌀은 이곳 양곡창고에 임시로 보관됐다가
삼례역을 통해 군산까지 기차에 실어 보내졌고, 다시 군산에서는 일본까지 배로 옮겨졌다.
밤마다 쌀을 싣는 일본군들의 ‘한 섬이요, 두 섬이요’하는 소리는 1년 내내 피땀 흘려
농사지은 곡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농부들의 나라 잃은 비통함, 배고픈 설움과 한(恨)스러움을 고조시켰다.
당시 이 억장이 무너지는 사연을 몸소 겪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직도 밤만 되면 그때 그 소리가 귓가에 구슬프게 맴돈다고 하신다.
그 옛날 습지였던 이곳에 지금은 맹꽁이, 달팽이 조형물들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한낱 양곡창고였던 곳이 지난 2013년에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등록문화재 제580호가 되기까지…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과거를 끌어안은 완주군의 용기와
창의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한 문화예술인들의 열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무와 책, 사람 냄새와 문학의 향기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디자인박물관’이다. 삼례문화예술촌 탄생 논의가 시작된 곳이기도 한 이곳은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가 주최하는 국제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수상 작품을 전시할 공간이 없어 안타까워했던 예술인들이 양곡창고를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만들어보자고 한 것이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본 따 디자인한 가습기부터 30초 이내에 접을 수 있는 간편한 자전거,
뚜껑 회전방향에 따라 한쪽에는 파운데이션이 다른 한쪽에는 메이크업 베이스가 나오는 화장품,
1인 가정을 위한 벽걸이형 세탁기까지 실용적이고 기발한 디자인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
디자인박물관을 나와 깊고 진한 나무 향을 따라 걷다보면, ‘김상림목공소’를 만난다.
입구에는 차곡차곡 결대로 조각난 나무들이 쌓여있다.
목공소 내부에는 못 하나 박지 않고 짜 맞춤으로 만들어진 가구들과 나무를 잘 말려 다듬은 사람 모양의 자목상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전통 소목 기술을 활용한 김상림 작가의 생활 가구를 비롯하여 장인들이 사용하던 공구 등이 가득하다.
목공소 맞은편에는 박대헌 관장이 평생 수집한 책들을 모아 만든 ‘책박물관’이 자리한다.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전시된 책들만 둘러보아도 그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철수와 영희가 등장하는 김태형 작가의 교과서 그림들은 친근하게 그 시절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그 옆, ‘송광용 만화일기 40년’에서는 한국 현대사와 발맞추어 만화가로 살아온 그의 행적을 속속들이 만나볼 수 있다.
한편, 박물관 입구 한 켠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인 헌책방 ‘정직한 서점’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소설, 잡지, 시집, 그림책 등 다양한 헌책들을 기본 2000원부터 양심껏 책값을 내고 구입할 수 있다.
책공방과 미디어 아트
책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책공방북아트센터’에도 볼거리가 많다.
손수 책을 만들 때 사용한 납 활자에서부터 활자 인쇄 기계까지 책 제작 기술에 사용된 도구들이 차례로 전시되어 있고,
한 쪽에는 책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어 유익한 체험도 즐길 수 있다.
특히 다른 공간에 비해 천장이 굉장히 높은 이곳은 기둥 하나 없이도 당시 일본인들이 직접 가져와 만든 나무들이 공간 전체를 지탱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이곳 곡물들을 수탈하고 쌀이 썩지 않도록 통풍과 습기 제거를 위해 둥근 기둥을 설치한 것.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마지막 창고의 녹슨 문을 열고 들어가니 외관과 전혀 다른 예술의 세상이 펼쳐졌다. ‘비주얼미디어아트미술관’이다.
미디어와 예술이 하나 된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으로, '만남과 대화'라는 주제로 전시가 한창이었다.
유리관, 커튼, 종이, 철사 등 일상 속 평범한 사물들이 프로젝터 빔과 만나 새로운 빛과 영상으로 변화하며 아름다운 경험을 선사해준다.
우리는 망각의 동물이지만,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이곳에서 우리네 조상들이 겪은 고난의 세월이 우리에게 멍든 자국일지라도, 우리 역사의 한 조각이다.
이 흔적을 현재 우리 삶에 융화시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곳.
삼례문화예술촌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더 깊고 특별한 것은 이런 힘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