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70 March 2021
우리나라 최초로 그물망 위성통신 기술을 적용한 ASIC 모뎀칩은 세계 시장 진출의 가능성을 열었다. 위성통신 장비의 크기를 줄이고, 생산비용을 1/10 수준으로 줄여 시장 진입장벽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위성통신 기술로 ASIC 모뎀칩을 개발해 우리나라 위성통신 기술 경쟁력을 드높이고 있는 위성광역인프라연구실 유준규 실장을 만나보았다.
위성통신 시스템은 정지궤도(적도에서 36,000km 거리) 위성이나 저궤도(지표면에서 500 ~ 1,500km 거리) 인공위성을 사용하는 통신 시스템을 말합니다. 위성통신 시스템은 우주 공간에 있는 인공위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위성통신 송·수신 장비만 갖춰지면 언제 어디서나 통신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지상통신망은 기지국이 설치된 곳은 통신이 원활하지만, 기지국이 설치되어있지 않은 곳은 통신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지상 통신망을 주로 이용하고 있고, 이용자가 많은 도심지역을 위주로 기지국을 설치했습니다. 기지국은 계속 설치되고 있지만, 해상이나 산간·도서 지역, 이용자가 많지 않은 곳처럼 기지국을 설치하기 어려운 지역은 아직도 통신이 어려운 곳이 많습니다.
위성통신의 장점은 이런 지리적 조건에 상관없이 통신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해상에서 주로 활동하는 해경이나, 전시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군(軍)의 경우에는 위성통신 시스템을 주 통신망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재난이나 재해 등으로 지상 기지국이 파괴된 경우, 혹은 기지국이 없어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곳에 조난을 당한 사람이 있는 경우 등 통신 서비스가 필요한 위급상황에 위성통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ASIC 모뎀칩과 위성통신 프로토콜의 개발은 한 마디로 1)그물망(Mesh Topology) 통신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존 위성통신 시스템은 2)성형망(Star Topology) 통신을 사용했습니다.이용자 A와 B가 통신을 한다고 가정하면, 성형망 통신은 [A - 위성 - 중심국 - 위성 - B]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여기에서 1초 이상의 통신 지연 생기게 되는데, 평상시라면 조금 불편한 수준이지만 매 순간 상황이 달라지는 재난 상황 같은 경우에는 이 통신 지연이 매우 치명적입니다.
저희는 성형망과 그물망을 하나의 중심국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3)프로토콜을 개발하였고, ASIC 모뎀칩 내에 송신부와 수신부를 한데 모아 통신 과정을 [A - 위성 - B]로 줄였습니다. 단말과 단말이 중심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 통신하는 그물망 통신 기술을 개발한 것입니다. 통신 과정을 절반으로 줄였기 때문에 통신 지연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ASIC 모뎀칩은 행정안전부의 재난 안전 부처협력 기술개발 사업을 통해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경기소방본부/충북소방본부/소방청은 긴급통신망으로 위성통신망을 사용하는데, 프로토콜이 다 달라서 서로 통신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저희는 각기 다른 프로토콜을 통합해서 하나의 중심국으로 성형망, 그물망, 회선망이 모두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로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 그물망 통신(Mesh Topology)
단말끼리 직접 통신하는 방식
2)성형망 통신(Star Topology)
단말 간 통신 과정에 ‘허브’라고 불리는 중계기를 거쳐 통신하는 방식
3) 프로토콜(protocol)
컴퓨터나 원거리 통신장비 사이에서 메시지를 주고 받는 양식과 규칙의 체계, 즉 통신 규약
ASIC 모뎀칩을 활용한 그물망 통신 시스템의 개발은 한국 기업이 세계 시장에 나아갈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사업이 그렇겠지만, 위성통신 시장에서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이전에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가 시스템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 위성통신 사업들은 그물망 통신을 기본 조건으로 내걸고 있어 국내 업체가 사업을 따내기 어려웠습니다. 경험을 쌓기 어려우니 다른 시장에서 사업을 수주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이번 ETRI에서 개발한 ASIC 모뎀칩과 그물망 위성통신 시스템은 국내에 없던 세계 최고 수준의 그물망 위성통신 기술입니다. ASIC 칩이 상용화된다면 기술적인 기준을 충족하고, 경험을 쌓아 미국과 이스라엘의 거대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는 기반을 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불어 기존 재난통신에 사용되었던 위성통신 장비는 안테나, 안테나 제어기와 모뎀 등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전문 인력이 운용해야 했습니다. 1대에 10억 가량의 장비 가격도 부담이었습니다. 저희가 ASIC 모뎀칩과 함께 개발한 위성통신 장비는 구조를 단순화하여 일반인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크기를 줄여 제작 비용을 줄이고 이동성도 확보했습니다. 이런 점들은 위성통신을 보편화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올해로 ASIC 모뎀칩 개발 4년 차가 됐습니다. 지금은 행안부와 함께 실증시험을 진행하는 단계입니다. 지자체나 지역에 그물망 통신 시스템을 설치하고 재난통신사업에 사용할 수 있을지 검증하는 단계죠. 이 검증을 통과하면 ASIC 모뎀칩과 이를 활용한 그물망 통신 시스템을 확대 보급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ASIC 모뎀칩은 송신기와 수신기는 합쳐져 있지만 4)CPU가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 CPU까지 하나로 모으는 것이 1차 목표입니다, ASIC 모뎀칩은 따로 떨어져 있던 송신기와 수신기를 한데 합치면서 크기도 작아지고 제작하는 비용도 줄었기 때문에, CPU까지 합칠 수 있다면 더 작은 장비를 더 싸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6G 사업 등에 저희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을 수주하고 글로벌 표준과 기술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말이죠. 북한이나 아프리카 등 광케이블을 설치하기 어려운 지역이나 나라에 저희가 개발한 기술을 사용하면 위성통신 시스템을 저렴하고 빠르게 구축해 정보와 서비스의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CPU(Central Processing Unit)
기기에서 기억, 해석, 연산, 제어 기능을 처리하는 중앙 처리 장치. 기기의 머리에 해당한다
유준규 실장의 최종목표를 묻자, 그는 “한국의 위성통신 기술이 글로벌화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이 위성통신 사업에 뛰어들자 한국의 위성통신 기술도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하면서도, “저희가 개발한 기술이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을 소망합니다”라며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