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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vol.30 2015.01.09
스토리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성공

미래창조과학부는 광복 70년을 맞아 국가과학기술심의회 위원장과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대표성과선정위원회를 통해 '광복 70년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을 발표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국가 경제발전을 이끌어 온 과학기술로 선정된 70선에는
ETRI가 개발한 TDX-1, DRAM, CDMA, WiBro가 포함됐다.
그 중 세 번째 기술 CDMA에 대하여 알아본다.

새로운 기술 CDMA와의 만남

ETRI는 1988년에 우리나라 이동통신 사업의 발전을 위해 ‘디지털 무선통신 시스템 개발 과제’를 정부에 제안했다.
ETRI가 1차적 연구목표로 삼은 기술은 TDMA(Time Division Multiple Access).
미국의 표준 방식인 IS-54 TDMA(US TDMA) 방식을 토대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 퀄컴사가 개발한 CDMA 이동전화실험시스템(RTS :Roving Test System )을 만나게 된 것이 CDMA의 시작이다.
1990년 11월, 이동통신 연구책임자의 미국 출장은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의 전환점이 됐다.
1989년에 미국의 퀄컴사가 실시한 CDMA 셀룰러 시스템에 관한 실험기록을 우연히 접하게 된 것.
CDMA는 가입자 용량면에서 아날로그 방식의 10배, TDMA 방식의 3배 이상이었고,
음질 면에서도 TDMA 방식보다 뛰어난 신기술이었지만 아직 상용화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CDMA는 무엇보다 새롭게 등장한 기술이었다.
또한 CDMA 방식으로 시스템을 개발할 경우, 선진국의 기술 종속을 벗어나 세계시장 진출을 실현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우려를 표명하는 정부와 학계, 산업계를 설득 하고, 1991년 5월 6일에 퀄컴사와 CDMA 기술 공동개발계약을 체결했다.

난관에 부딪히다

개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수출입을 담당하는 상공부가 CDMA 개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고,
1993년 7월에는 ETRI와 퀄컴 간의 교환방식 선택에 관한 의견 차이가 발생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퀄컴은 패킷 교환방식을, ETRI는 써킷 교환방식을 주장했다.
패킷 교환방식은 당시 새롭게 등장한 ATM 교환기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써킷 교환방식은 TDX 교환기를 바탕으로 ETRI가 일부 기능 변경으로 개발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ETRI의 선택은 우리나라 교환망이 TDX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이처럼 CDMA 공동개발 사업은 업체 선정 작업의 지연, 상용화 일정 단축, 교환방식의 논란 등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계획한 상용화 시점도 불확실해졌다.

시간과의 싸움, 그리고 CDMA 첫 통화

개발 기간의 단축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퍼트(PERT : Program Evaluation Review Technique)와 주간보고제 도입이다.
또한 퀄컴사와 의견이 달랐던 교환기 문제에서도 더 이상 논쟁을 피하고
ETRI에서 주장한 타임스위치 방식으로 독자적 연구개발을 추진했다.
퀄컴의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하드웨어에 대한 회로도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블록 설계서를 작성했다.
연구실 역시 프로세서의 이중화로, 보편적으로 시스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등을 개발했다.
그리고 드디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 ‘KSC(Korean Cellular System)-1’다.
KSC-1 구조는 ETRI가 확보하고 있던 TDX-10 교환기에 이동시험 시스템을 결합한 것이었다.
기능을 추가하고 재설계를 시도해 시험시제품 KCS-2를 제작했다.
1994년 4월 17일, KCS-2가 첫 통화를 성공적으로 터트렸다.
단말기와 시스템으로 전파를 통해 통화가 이루어진 최초의 이동통신 통화였다.
그 후 다음달 5월, 한국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의 표준규격으로 CDMA가 선정됐다.
통신 기술 선진국이었던 미국도 2개월 후에 CDMA를 표준으로 제정해 상용 서비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성공

첫 통화에 성공한 지 두 달 만에 상용모델인 CMS-1의 시험통화에 성공했는데, 이는 개발 일정을 3개월이나 앞당긴 쾌거였다.
CMS(CDMA Mobile System)는 KCS와 달리 처음부터 경제성을 고려해 만든 상용가능 모델이었다.
이어 1994년 10월, 차량형 단말기 간 통화(Ms-to-Ms, 이동국 대 이동국)에 성공.
업체들도 각자 맡은 부분에서 독자적인 상품개발에 주력해 3개 회사가 모두 개발에 성공했다.
그 후, 이통통신 기술개발 사업관리단은 업체들의 상용모델에 대한 인증시험을 추진했다.
1천여 개의 시스템 사용시험 항목을 업체들에게 통보하고, 상용화를 위한 최종 관문인 인증시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1천여 항목에 걸친 시험에서 공동개발 업체들의 통화 성공률은 합격 기준치인 95%를 넘어 98%를 기록했다.
5년 동안의 땀과 노력이 결실로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1995년 6월 9일, 코엑스에서 CDMA 상용 시험통화 시연회가 개최됐다.
상용화를 앞두고 마지막 평가를 받는 자리로서 시연회는 대성공이었다.
세계 어디서도 상용화되지 않은 첨단기술인 CDMA 기술을 ETRI를 비롯한 국내 업체가 최초로 상용시험에 성공한 것.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 제네바의 TELECOM쇼에서 CDMA 성공을 세계에 발표했고,
국내 언론을 비롯한 외신들은 한국의 단기간 CDMA 상용화 성공을 전 세계에 알렸다.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 성공 후, 1996년부터 국산 시스템으로 서비스 상용화가 시작되면서
이동전화 장비와 단말기 사업의 대외 의존도가 급격히 감소했다.
1996년 말을 기준으로 국내에 판매된 총 102만대의 단말기는 전부 우리나라 기업의 제품이었다.
또한, 모토로라조차도 국내 중소기업을 인수해 CDMA 단말기를 국내에서 개발 생산하기 시작했다.
CDMA은 이렇게 우리나라가 이동통신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더 나아가 세계 최강국으로 거듭나는데 포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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