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전망대
강화 평화전망대는 우리나라에서 북한 땅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다. 평화전망대에서 북한까지의 거리는 불과 1.2km. 하지만 눈앞에 두고도 갈 수 없는 북녘 땅은 신기루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평화전망대 1층에는 강화특산품과 북한특산품을 판매하는 특산품 판매장, 그리고 그 옆에는 통일의 염원을 적어 매달아 놓는 통일염원소가 있다. 2층에는 옥내 전망대와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3층에는 북한의 산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강화도는 역사적으로 침략을 많이 받은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서해상에서 북한과 가장 인접한 곳이기도 하다. 전망대 내부로 들어서자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철모, 어린 소년이 갓난쟁이 동생을 등에 업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 등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전시물들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북한 땅을 바라보기 위해 3층으로 올라갔다. 굳이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아도 황해북도 개성의 송악산과 개풍군 평야지대, 그리고 율동리 마을이 보였다. 마을에는 간간히 북한 주민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과 삼삼오오 모여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북한 주민들이 난방용 땔감으로 나무를 베어 쓴 탓에 송악산은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손에 잡힐 듯 한 곳에 있어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분단의 현실에 가슴 한 켠이 뻐근해진다.
야외에는 망배단이 설치되어 있어 실향민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조상들에게 제를 올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 옆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는데 버튼을 누르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애절하고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이리 가까운 거리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들의 그리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침략의 역사를 간직한 갑곶돈대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역사책과 같다. 선사시대의 고인돌, 단군의 참성단, 고려 팔만대장경 판각의 성지인 선원사 등 지정문화재만 100건이 넘는다. 또한 지리적 위치상 온갖 외세 침탈을 견딘 곳이기에 ‘호국의 보루’라고도 불렸다. 지금도 갑곶돈대, 초지진, 덕진진 등의 유적지에 가면 외세와 전투를 치른 당시의 대포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들 중 다음 여행 장소로 ‘갑곶돈대’를 택했다. ‘돈대’는 해안가 높은 언덕에 세운 군사요새를 말한다. 그래서인지 갑곶돈대에 서서 바라본 문수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갑곶은 고려 고종 19년(1232)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뒤 몽골의 끊임없는 침입으로부터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지역으로, 숙종 5년(1679) 돈대를 설치해 작은 대포를 배치하여 도성을 지켰다. 숱한 외세의 공격을 막아낸 역사의 현장, 갑곶돈대 끝에 서서 바라본 남한강 물결은 질곡의 세월을 모두 감내하는 듯 잔잔하기만 하다. 그 고요는 평화롭고도 엄숙하게 느껴졌다.
갑곶돈대에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탱자나무’이다. 바로 천연기념물 제78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이다. 수령이 4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이 탱자나무는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심은 국토방위의 유물로서,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뒤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몽고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성벽을 따라서 올라가보면 이섭정이라는 2층 정자가 나온다. 고려 때 몽골과의 외교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원래는 옛 진해루 옆에 있었는데 무너진 지 오래되어 태조 7년(1398) 현 자리에 복원하였으나 1976년 옛 건물을 재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이섭정에 오르면 강화대교와 강화해협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강화해협은 강화도와 김포사이에 좁고 긴 바다이다. 강화도는 예로부터 수도 서울과 가깝기 때문에 적들이 배로 침략할 수 있는 통로였는데, 강화해협이 물결이 세고 깊은데다 소용돌이치며 흐르기 때문에 배로는 건너기 어려워 천연의 요새가 되었다고 한다.
소망과 성찰의 관음성지강화도에는 기도효과가 뛰어난 곳, 즉 관음성지로 유명한 사찰이 많이 있다. 특히 석모도 낙가산의 보문사는 전등사, 정수사와 더불어 강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찰 중 하나이다.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만나 강화도로 내려와 창건한 사찰이라고 전해진다. 보문사로 가기 위해서는 강화읍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로 이동해야 한다. 배를 타고 석모도로 가는 시간은 5~10분 정도로 그리 길지 않아 금세 선착장에 다다른다. 보문사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켜켜이 쌓아놓은 작은 돌탑들이 보인다. 돌탑에 그들의 염원들이 알알이 새겨졌으리라. 이내 보문사에 도착하였다. 경내는 기도객 뿐만 아니라 나들이 나온 가족이나 연인들, 등산객들로 붐볐다. 수령이 300살이 넘는 향나무, 느티나무들이 보문사의 역사를 증명하듯 위엄있게 서 있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바위처럼 보이는 석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보문사 석실은 경북 경주의 석굴암, 경북 군위의 삼존석굴, 강원도 속초의 개조암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몇 안되는 석굴사원 중 하나이다. 천연동굴을 이용해 만든 석실은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을 조성하고 그 안에 감실을 마련해 놨다. 석실 안에 봉안된 23불의 나한상은 보문사의 대표적 문화재로 알려져 있다.
보문사 중심에 자리한 극락보전은 60평 정도의 웅장한 규모였다. 법당 내부 상단에는 아미타부처님과 좌우 협시로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었다. 또 사찰 한쪽에 만들어진 범종은 故 육영수 여사가 시주하여 만든 것으로 알려져 유명해졌으며, 조성 당시 우리나라 최대 규모여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보문사의 마애관세음보살을 보기 위해서는 419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까마득한 계단의 길이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길’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소망을 담아 걸어 오르다보니 어느덧 정상에 도착했다. 숨을 고르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그 위에 떠있는 작은 섬들, 그리고 그 속에 안겨있는 보문사의 뒷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썹 모양의 화강암 바위 아래 새겨진 마애관세음보살을 바라보았다. 네모난 얼굴에 뭉툭한 코, 두터운 눈이 새겨져 있고 가슴에 만(卍)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마애관세음보살 앞에는 넓은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어 그 위에서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를 올린다.
마애관세음보살까지 보고 보문사를 내려오니 마음이 한결 청량하고 가벼워졌다. 현실과 상황을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내 자신과 마주하니 삶이 더욱 소중해 짐을 느낀다. 사시사철 보문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