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컴퓨터의
연산 능력은?
세계적인 과학자 엘론 머스크는 이전부터 인류가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한 콘퍼런스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현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가 컴퓨터 게임에서 재현한 가상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최대 규모인 우주의 생성과 진화 시뮬레이션부터 인간 암유전체 지도를 완성해 나가는 일. 슈퍼컴퓨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최근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슈퍼컴퓨터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고 있다. 슈퍼컴퓨터는 일기예보, 양자역학적 시뮬레이션, 암호 해독 등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작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 때문에 슈퍼컴퓨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연산속도다.
연산속도를 비교하기 위한 값으로 많이 쓰이는 것이 IPS(Instructions Per Second)다. IPS는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가 1초에 처리하는 명령의 수를 뜻한다. 그러나 복잡한 명령어 집합을 갖는 CISC(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er)의 경우, 명령의 종류에 따라 처리하는 시간이 달라 IPS를 정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또 데이터의 양과 종류에 따라 명령의 처리 속도는 달라진다. 같은 데이터와 같은 명령일지라도 처리 순서가 달라지면 속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어 IPS 대신 컴퓨터의 성능을 비교하기 위한 값이 필요하다.
이럴 때 사용하는 값이 FLOPS(Floating Point Operations Per Second)다. 컴퓨터가 1초에 처리할 수 있는 부동 소수점 연산 수를 의미하며, 부동 소수점은 아주 큰 수 또는 아주 작은 수를 컴퓨터에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소수점의 위치를 유동적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소수점 앞 자릿수와 뒷 자릿수를 조절할 수 있다.
FLOPS 기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슈퍼컴퓨터는 지난해 말 기준, 미국 IBM의 서밋(Summit)이며, 1PF는 1초에 10의 15제곱 회, 즉 1천조 번의 연산을 수행한다. 좀 더 쉽게 말해 1초에 20경 2000조 번 계산이 가능한 셈이다.(207 PF)
인간 암유전체
지도를 그리다
이러한 슈퍼컴퓨터를 통해 인류는 저 우주라는 시공의 구조는 물론 그것의 생성과 진화까지 시뮬레이션해 보는 단계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인류의 최대 난적이자 고통받는 질병 중 하나인 암을 정복하기 위한 유전체 분석에도 나섰다. 지난달 6일, 세계적 과학전문 저널인 네이처(Nature)에 아주 특별한 글이 게재됐다. 바로 세계적 과학자가 함께 힘을 모아 드디어 인류의 암유전체를 최종 분석했다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인간 유전체를 뜻하는 게놈(Genome)을 분석해 지도를 완성한 것이다.
본 연구에는 ETRI 연구진이 자체 개발한 슈퍼컴퓨터 ‘마하’(MAHA)가 유전체 분석에 한 몫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인간의 유전체를 규명함에 따라 이와 같은 성과는 향후 새로운 방식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ETRI 연구진이 전 세계 연구진에게 제공한 슈퍼컴퓨터 ‘마하’는 지난 2013년 11월부터 2017년 말까지 국제 암유전체 컨소시엄(ICGC)에 유전체 분석을 위해 고성능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를 제공한 바 있다. 연구진은 세계적 연구기관들과 함께 인간의 암 유전체 분석을 위해 과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슈퍼컴 인프라를 지원한 것이다.
ETRI 연구진이 개발한 마하는 1.3 페타바이트(PB) 스토리지 시스템과 800코어 규모의 CPU 컴퓨팅 자원을 ICGC 등에 제공했다. 마하는 본래 우리나라 전 국민 유전체 서비스를 대비해 기존 고성능컴퓨팅(HPC) 기술 기반 위에 저가의 대규모 스토리지 기술개발에 중점을 둔 프로젝트였다. 전 세계 연구진은 ETRI를 포함한 8개 기관의 고성능 컴퓨터를 활용해 38개 종양의 종류에서 2,658개 유형의 암유전체를 계산했다. 이외에 우리나라 의료진도 참여해 폐암, 혈액암 그리고 유방암 샘플을 제공하기도 했다.
슈퍼컴퓨터
경쟁력이
미래의 핵심
슈퍼컴퓨터는 다양한 분야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기존에는 주로 날씨예측에 이용되었는데, 우리나라 기상청도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기상예보에 활용해 왔다. 슈퍼컴퓨터는 위성을 통해 주변 영상을 관측한 후, 자료를 수집 및 처리를 해서 기상예측자료를 생산한다. 슈퍼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더욱 더 정확한 날씨를 예측할 수 있다. 아울러 복잡한 수학 공식을 풀기 위해 연구하는 수학, 물리학 관련 기관에서도 슈퍼컴퓨터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유전학, 석유 탐사, 각종 신약 개발, 자동차 설계와 제작에 필요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제작, 원자로의 안전성 검증 등 광범위한 분야에 슈퍼컴은 활용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핵심 기술 중 하나인 인공지능의 성능은 하드웨어의 성능에 비례하는데, 인공지능의 연산처리 능력을 감당할 수 있는 하드웨어로 슈퍼컴퓨터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아울러 빅데이터 분석이나 활용을 위해서도 슈퍼컴퓨터의 역할은 중요하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슈퍼컴퓨터의 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빅데이터는 소비자의 반응을 살피고,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데 적극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데이터 분석 속도를 빠르게 도와주는 슈퍼컴퓨터는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는 국가는 미국과 중국이다. 지난해 말 기준 Top 500 순위를 보면, 미국의 서밋과 시에라(Sierra)가 1, 2위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의 선웨이 타이후 라이트(Sunway TaihuLight)와 텐허-2A(Tianhe-2A)가 3, 4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슈퍼컴퓨터 5호기 누리온은 14위이다. 이로써 우리나라도 슈퍼컴퓨터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국가과학기술과 인공지능 경쟁력 향상 측면에서, 슈퍼컴퓨터 독립성과 자생력을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