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통신강국을 세운 주역
‘1인 1전화’ 시대를 열다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기술은ETRI의 대표적 연구성과이다. 이로 인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정부가 선정한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성과다.
이동통신의 수요폭증에 대응하여, 통화용량을 아날로그 방식보다 수십 배 증가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로, 독자적 방식으로 개발에 성공하여 1996년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로써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가 ‘이동통신강국의 신화’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01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나라 이동통신 서비스는 급속도로 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안보를 이유로 제약을 받아오던 이동통신 분야에 족쇄가 풀려 요가 급증했다. 게다가 100만원을 호가하는데다 등록하는 데만 2~3년이 걸리고 통화품질도 나빴던 기존 이동전화의 제약이 개선되고, 서비스 지역도 대폭 확대되면서 이동전화 가입자 수도 급증했다.
1990년 말에는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8만 명에 도달함으로써 매년 100% 이상의 가입자 증가세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는 가입자 적체 현상으로 이어졌고 서비스 질은 제자리걸음을 계속했다. 통화 중 단절, 혼선 등 휴대전화 통화품질 불량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가는 한편, 아날로그 시스템의 한계가 나타나면서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이 대안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02
‘신의 한수’와도
같은 선택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바꿔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 ETRI는 1981년부터 이에 대비한 연구를 시작했다. ETRI는 1988년 ‘디지털 무선통신 시스템 개발 과제’를 정부에 제안했고, 이를 토대로 1989년부터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 사업’을 국책 과제로 수행했다.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접속방식으로, 시간분할방식인 TDMA(Time Division Multiple Access), 주파수분할방식인 FDMA(Frequency Division Multiple Access), 코드분할방식인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GSM(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 등이 있었다.
ETRI가 1차적 연구목표로 삼은 기술은 TDMA였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이 제기됐다. 먼저 개발완료 시점의 가입자 증가 추세를 TDMA 수용 용량과 비교할 때 보다 많은 용량의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리고 시간분할방식은 이미 유럽에서 상용 서비스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고, 북미식 시간분할방식도 개발 완료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 기술을 이용해 시스템을 개발할 경우 또다시 선진국에 기술적으로 종속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국내 기업이 선호했던 GSM 방식 역시 수용 용량이 CDMA의 절반 수준으로 영상 등 멀티미지어 전송량이 급증하는 3세대 이동통신에 적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CDMA가 차세대 이동통신 접속방식으로 떠올랐다.
ETRI 역시 중장기적으로 내다봤을 때 CDMA가 가장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던 중 ETRI는 미국 퀄컴사가 개발한 CDMA 이동전화실험시스템(Roving Test System)을 접하게 된다. ETRI는 CDMA 기술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CDMA는 가입자 용량면에서 아날로그 방식의 10배, TDMA 방식의 3배 이상이었고, 음질 면에서도 TDMA 방식보다 뛰어난 신기술이었다. 그리고 CDMA 방식으로 시스템을 개발할 경우 선진국의 기술 종속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 진출에도 유리할 것으로 판단됐다. 결국 ETRI는 퀄컴사와의 CDMA 기술 공동개발을 결정하고, 1991년 5월 6일 공동개발계약서에 서명한다.
03
도전정신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ETRI가 CDMA 기술로 디지털 이동전화를 개발하겠다고 하자, 관련 산업계는 물론 학계에서조차 불신과 우려를 드러냈다. CDMA는 기술적으로는 완성단계일지 모르지만 아직 실제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검증되지 않은 방식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연구원들의 주 업무는 연구가 아니라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일 정도였다. 당연히 개발에 착수해서도 실질적인 ‘개발’을 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기술을 보고, 알고,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했다. 1단계 개발 기간 동안에는 기초 이론과 기본 기술 정보를 파악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개발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ETRI는 2단계부터 기업을 개발에 참여시켜 개발 일정을 단축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업체선정이 늦어지면서 촉박한 개발 일정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상공부가 제2이동통신 서비스 방식은 TDMA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체신부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CDMA 상용화 계획을 2년이나 앞당겨 1995년에 상용화하겠다고 발표했다. ETRI는 퀄컴사의 도면만을 기다릴 수 없어 기본적인 상위 설계서만으로 하위 설계까지 자체적으로 해결해나갔다. 그러던 중 큰 수확이 있었다. 바로 프로세서의 이중화로, ETRI는 기존에 확보하고 있던 TDX-10 교환기에 이동시험 시스템을 결합한 KSC(Korean Cellular System)-1을 만들었다. 이후 기능을 추가해 시험시제품 KCS-2를 제작했다. 그리고 1994년 4월 17일, KCS-2가 첫 통화를 터트렸다.
결국 1994년 5월, 한국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의 표준규격으로 CDMA가 선정됐다. 그리고 1995년 6월 9일 CDMA 상용 시험통화 시연회가 개최됐다. 시연회는 대성공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상용화되지 않은 CDMA 기술의 상용시험을 성공시킴으로ㅆ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입증한 것이다. 그리고 1995년 말 제네바의 TELECOM쇼에서 ETRI는 CDMA 성공을 세계에 발표했다.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외신들도 한국이 짧은 기간에 CDMA 상용화에 성공한 것을 대서특필했다.
04
대한민국,
세계 이동통신시장의 중심으로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로 대한민국은 이동통신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더 나아가 세계 이동통신 산업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특히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롯한 국내 휴대전화 제조업체들의 발전은 가히 비약적이었다. 이동통신 장비와 단말기 사업의 대외 의존도도 급격히 감소했다. 1996년 말을 기준으로 국내에서 총 100만여 대의 단말기가 판매됐는데, 우리나라 기업의 제품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단말기뿐만 아니라 시스템, 중계기, 계측기 등 CDMA 통신 장비 생산을 활성화함으로써 우리나라 산업경제 전반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IMP 국제금융 위기 속에서도 우리나라 IT산업이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동통신의 발전, 특히 CDMA 개발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CDMA 개발 이후 국내 IT 시장은 약 수백 배 커졌다. 이제 IT산업은 이동통신 장비와 반도체를 포함하면 우리나라 수출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실생활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공중전화와 '삐삐'가 사라지고, '길거리에서 휴대전화를 공짜로 나눠주는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휴대전화 가격이 몇 백만 원이고 비즈니스용도 외에 개인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이동통신 여건이 얼마나 앞서나갔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 1988.
- ETRI, 디지털셀룰러 연구에 관한 프로젝트 체신부에 제안
- 1992.07.
- 양승택 원장, 미 퀄컴사 방문, CDMA 디지털 셀룰러 공동개발 협의
- 1993.08.
- ETRI, 독자개발 추진
- 1994.04.
- 시험통화 성공
- 1994.09.
- 상용시제품 완료
- 1994.10.
- 이동국 대 이동국(CMS) 통화 성공
- 1995.06.
- CDMA 상용통화 시험 성공
- 1996.04.
- 세계최초 CDMA 상용화 성공
- 1996.11.
- ETRI 주최, 제1회 CDMA 국제컨퍼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