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강국의
기틀을 세우다
행정전산망용주전산기Ⅱ(TiCOM) 개발
1980년대 국가 출연(연)에 주어진 사명은 단순했지만 무거웠다. 바로 ‘기술의 국산화’.
당시 출연(연)의 가장 큰 사명은 주로 선진국의 기술을 들여왔던 것을 뛰어넘어 우리 기술로 만든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연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PC 조립과 OEM 방식의 생산 위주였던 국내 컴퓨터기술의 수준을 중형급 컴퓨터 개발이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ETRI의 행정전산망용주전산기Ⅱ(TiCOM, 타이컴) 사업 역시, 그러한 시대적 사명에서 탄생했다.
01
동시에 진행된
기술도입과 독자 모델 개발
1980년대 중후반, 당시 외국 제품(IBM)에 의존하고 있던 국가 기간행정망 메인 컴퓨터를 우리 기술로 만든 컴퓨터로 대체하기 위해 크게 두 가지 방식의 컴퓨터 개발이 진행됐다. 하나는 외국 기술을 도입해 국산화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기술로 만든 독자 모델을 개발하는 방법이다. 많은 논의 끝에 정부는 두 가지 방안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하고, ETRI를 중심으로 사업이 추진됐다.
이미 검증된 시스템을 바탕으로 빠른 상용화가 가능해 기업이 선호하는 기술도입 방식과 기술 국산화의 사명을 바탕으로 국책연구원이 선호하는 독자 모델 개발을 함께 수행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독자 모델 개발에 대한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빠르면 2년 만에 상용화가 가능한 기술도입 방안과 달리 독자 모델 개발방안은 최소 4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주전산기 기술 보유사인 톨러런트사로부터 원천기술과 생산·판매권을 이전받아 국산화하는 ‘주전산기Ⅰ 개발사업’이 진행됐다. 하지만 시스템이 불안정하고, 용량과 성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줄곧 제기됐다. 그러던 중 기술도입 기종 국산화 과정에서 예정에 없었던 ‘도입기종 안정화’ 문제가 발생했다.
주전산기Ⅰ으로 국민연금 관리업무를 전산처리하는 과정에서 운용체제 및 관련 소프트웨어의 오류가 발생해 사회적으로 큰 논쟁거리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기술적 오류를 넘어 사업을 추진 정부의 비리로까지 내몰리면서 상당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후 안정화 작업과 성능 개선에 많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문제를 해결했지만, 이는 곧 우리가 독자적으로 설계한 고유기종의 필요성을 더욱 커지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02
정보 기술 선진국을 향한
도전
독자 기술에 의한 중형 컴퓨터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대두하고 있던 1987년 6월 1일, 드디어 국산 행정전산망용 ‘주전산기Ⅱ 개발사업’, 즉 ‘타이컴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타이컴 프로젝트는 4년에 걸쳐 335억 원과 총인원 932명을 투입한 대규모 프로젝트로 단순히 국가 기간행정망을 국산으로 대체하는 것을 뛰어넘는, 더욱 원대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그 목표는 개발한 행정전산망을 통해 권력 측면에서는 ‘작은 정부’이면서, 민원 행정 업무 등 국민 서비스 측면에서는 ‘큰 정부’를 추구하는 행정 개혁을 일으키자는 것과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던 금융실명제와 종합토지세제 등의 실현을 가능케 해 ‘정의로운 경제 사회’를 구현하자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정보화 사회를 맞이해 하루빨리 우리 국민의 문화, 문명의식을 선진화시키고, 여타 산업을 다 합친 것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정보 산업을 부흥시킴으로써 ‘정보 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것이었다.
03
인재를 키워낸
타이컴 프로젝트
타이컴 개발 연구자들은 4년간의 연구 끝에 1991년, 애초 개발 목표인 슈퍼 미니급 컴퓨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20개의 CPU칩을 하나로 묶는 밀결합 구조로 제작된 타이컴의 이름에는 개발 당시 한창 준비 중인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상징하는 ‘호돌이 컴퓨터(Tiger Computer)’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뛰어난 성능으로 평가받고 있던 VAX-8800에 대항할 정도로 경쟁력 있는 강력한 중형급 컴퓨터로 탄생한 타이컴은 80MIPS 정도의 성능을 지녔다. 이는 초당 8천만 회의 정보처리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초당 4백만 회의 정보처리능력을 가진 톨러런트 컴퓨터의 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것이다. 개발된 시스템은 1.5MIPS 정도의 컴퓨터 32대까지 근거리통신망으로 연결해 사용할 수 있고, 행정전산망에서 요구하는 주요 조건인 온라인 트랜잭션 처리 기능과 고장 감내 기능 등이 있어 행정전산망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성능을 확보했다.
우리나라는 보드 수준부터 최종 시스템까지 직접 설계·제작함으로써 독자적인 중형 컴퓨터 설계를 구현하고 시험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소 열악한 국내 중형 컴퓨터 하드웨어 설계 및 소프트웨어 원천기술, 시스템 생산기술을 향상하는데 매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순수 국산 기술로 개발·보급된 중형 컴퓨터가 전국 곳곳 공공기관에 공급되면서 행정 전산화가 급속도로 확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타이컴 개발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단순히 슈퍼 미니급 컴퓨터를 독자 개발했다는 기술적인 쾌거를 뛰어넘어, 개발과정에서 양성된 수많은 인력을 통해 향후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 폭넓은 관점과 철학으로 단순히 기술 개발에 머물지 않고, 전자정부의 기틀과 인재를 키워낸 타이컴 개발. 우리 국민이 좀 더 편리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ETRI는 오늘도 연구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